한국희곡

오태영 '부활 그 다음'

clint 2023. 11. 6. 21:02

 

 

 

작은 방에서는 굶어 죽어갈 정도로 가난하지만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는, 젊었으나 병이든 어미와 어린 아들의 일상이 펼쳐지고, 큰 방에서는 너무 먹어서 당뇨와 고지혈증, 거기에다가 고혈압까지 앓고 있는 남편과 거식증에 치매까지 걸린 아내, 이런 칠십 대 노부부의 삶이 복선으로 깔린다. 모자는 불가능한 외부의 도움에 체념상태로 들어간 지가 오래 되었고, 노부부는 서로를 결박한 끈에 얽매여 역시 외부의 도움이 차단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된다 이러한 일상은 당연히 죽음까지 연결되고, 관객도 그것을 예견하지만, 작가는 필연적인 귀결로 묘사해 결말까지 몰아갔고, 과거의 공연에 물든 작가나 관객은 우연으로 받아들이고, 누구에게나 반드시 다가올 현실이고 필연적 귀결인데도 사람마다 애써 외면하고, 우발적인 것으로 해석하려는데 대해, 오태영 작가는 도끼나 망치나 예리한 흉기로 관객의 가슴을 미구 두드리고 난도질하고 헤집으며 주지시킨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종교적 부활의 의미까지 흉기로 난타하고, 그것을 인위적인 것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어린이를 통해 부각시키려 든다. 모자와 노부부가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장면까지 작가는 관객을 짓밟듯이 또는 패듯이 충격을 가해오지만 대단원에서 그것은 충격이 아니라 관객의 가슴을 굳게 다져준다. 우리 자신에게나 주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늘 접하게 되고 반드시 겪어야 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대부분의 작가나 관객들이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도외시하고 기피하려는 시선에 대해 작가는 대못을 박아 단번에 고정시키고, 관객의 가슴에 핵폭탄을 터뜨리는 그러한 연극이 부활 그 다음이다.

 

  

 

 

희곡작품 평 - 김윤미(극작가)

 

오태영의 희곡을 읽기 전에 드는 생각은 제목이 독특하다는 것이다. <통일 익스프레스>, <불타는 소파>, <부드러운 매장>, <부활 그 다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희곡 제목에는 어떤 비밀스러운 운동성이 느껴진다.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제목들은 비현실적인 공간을 부유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세계는 익숙한 사물들이 오히려 낯설어지는 그런 세계이다. 부활 그 다음을 읽으면서 아라발이 생각났다. 스페인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인 아라발의 희곡은 부조리한 상황에서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시적인 언어로 펼쳐놓는다. 아라발의 희곡은 자동차 폐차장에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들, 시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찢겨진 영혼들의 핏방울처럼 섬뜩하면서도 감미롭다. 이 감미로움을 좀 더 자세하게 비유하자면 그것은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일 것이다. 부조리 극작가로 베케트보다 더 많은 작품을 쓴 아라발이 주목받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비참함의 극치일 것이다.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와 같이 희망이 분명하게 그려지지 않아서일까. 베케트는 적어도 희망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난다 해도 언젠가는 고도가 올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없다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전으로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태영의 부활 그 다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베케트와 아라발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희망 때문이다. 아라발의 희곡 속에는 베케트가 그린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희곡의 인물들은 적어도 삶 자체를 받아들인다. 아라발 희곡 속 인물들의 삶이란 시체를 사랑하고, 같은 춤을 반복하고, 폐차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중에 붕 몬 자들의 삶이다. 도대체 그들이 현실 속에 사는 건지 악몽 속에 사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삶. 그들은 사랑하고 춤을 추고 질투하고 의심한다. 아라발의 희곡 속 인물들은 살아가고 있고, 살고자 한다. 아라발과 같은 부조리 극작가의 희곡 속 인물들은 체홉의 희곡 속 인물들처럼 자살하지 않는다. 어떤 삶이 더 비참한지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비참함은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태영의 부활 그 다음의 인물들은 희망을 논하지 않는다. 모두 7장으로 구성된 이 희곡 속 인물은 4명이다. 태오와 엄마가 사는 지하 단칸방과 위층인지 옆집인지 알 수 없는 70대 노부부가 사는 집이 번갈아 나온다. 병든 엄마와 집에 갇힌 12세 아들 태오. 치매를 앓는 아내를 돌보는 노인. 그들은 사회의 약자이다.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의 삶이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무너져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부활 그 다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갇힌 자들이다. 그들을 찾아오는 친구도 가족도 없다. 단 두 사람만이 고립되어 있다. 열두 살짜리 태오는 배고픈 엄마를 위해 종이에 통닭과 빵을 그린다. 엄마는 수돗물에 자신의 피를 섞어 포도주 잔에 채운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처럼 태오와 엄마는 세상에 버려진 모자로 상징화된다. 엄마는 아들 태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치고, 태오는 나가지 않는다. 태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엄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치 태오가 아직도 엄마의 자궁 속에 갇혀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엄마는 태오에게 말한다. “이놈의 자본주의에서 악이 어디 있어! 없어. 오직 가난, 그것만이 악이지. 무슨 헛소리들이야!"

엄마는 태오에게 도끼를 머릿속에 넣어두라고 말한다. 엄마는 아들이 그린 통닭그림을 반으로 나눠 다정하게 건넨다. 태오가 그린 그림들로 식사를 하는 엄마는 자신의 피로 만든 포도주를 마신다. 태오도 포도주 잔에 담긴 엄마의 피와 섞인 수돗물을 마신다. 첫 장에 시작되는 엄마와 태오의 식사는 섬뜩하다. 자신의 피를 수돗물에 섞어 마시고, 그림에 그린 통닭과 빵을 먹는 행위는 연극적이다. 그리고 엄마는 운다.

저 문에 못질을 할 시간이 됐어. 이 무덤에" 엄마는 태오에게 나가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태오는 나가지 않는다. 하나님과 전화하기를 원하지만 전화도 끊긴지 오래다. 창문에 못질을 하는 엄마와 태오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나가서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누군가의 방문은 6개월 치 전기료 미납으로 부득이 단전을 통보한다는 편지뿐이다. 배고프다는 태오에게 엄마는 죽으면 자기를 빵 대신 먹으라고 말한다.

 

 

 

 

 

희곡을 여기쯤 읽으면, 단순히 독자로서 의문이 든다. 태오는 12살인데 왜 밖에 못 나가는 걸까. 엄마는 어디가 아픈 걸까. 태오의 친구들은 없는 걸까? <부활 그 다음>을 부조리극으로 분류하기가 망설여진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 부조리극은 비틀즈의 오래된 LP판 같다. 그러므로 부활 그 다음은 부조리하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노부부가 버려진 아파트에서 죽은 채 몇 주가 지나서야 발견되었고, 죽은 엄마 옆에서 오랫동안 혼자 살았던 아이가 발견되기도 한 한국에서 부활 그 다음을 부조리극이라고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오태영의 부활 그 다음이 그려낸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불편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가 그린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의 정제가 뭔지 떠오르지 시작한다. 그것은 죄의식이다. 부활 그 다음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희곡이다. 참담한 비극 속 인물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가난과 고립이 지금 내 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가난하고 고립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태오와 엄마의 현실이 전혀 낯선 세계가 아니다. 이런 느낌들, 태오와 엄마, 혹은 치매 걸린 노파와 약을 먹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노인의 절박함을 지금 내가 이해하고 또한 그런 감정을 느끼며 산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들을 모욕하는 것일까. 실제로 불행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행복은 사람이 느끼는 정도에 따라 다른 것으로 그것은 정신적인 영역이다.

태오나 엄마, 혹은 치매 걸린 노파와 약을 먹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노인의 불행은 정신적인 영역이 아니다. 그들의 불행은 실제상황이다. 그들이 오태영의 부활 그 다음을 읽게 될 날이 있을까. 그들이 그들에 대한 희곡을 읽을 날이 있을까. 그들의 모습을 그린 이 연극을 보러올 날이 있을까. 오태영의 희곡 속의 세계는 누구를 위한 세계일까. 그의 희곡은 잘 먹고 잘 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본주의 인간들에게 죄의식을 느끼라고 소리치고 있다. 나가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소년가장과 치매 노부부를 찾아가서 당장 그들을 구하라고 소리치고 있는 듯하다오태영의 부활 그 다음은 예수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다만 아들 태오가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을 기다린다는 마지막 장면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함을 가져온다. 죽어가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 알몸으로 엄마를 녹이는 태오의 몸짓은 근친상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엄마와 태오의 집 위층 혹은 옆집에 사는 노인은 먹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치매 걸린 아내의 변을 빵으로 닦는 노인은 치매 걸린 아내가 성경책을 찢어 변을 닦은 것에 대해 화를 낸다.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노인은 한때 시를 썼던 노파의 기억을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빨간 약에 대한 암시와 죽음을 유혹으로 여기는 노파의 어긋난 이해는 삶의 비참한 종말에 약간이나마 미소를 던지게 한다. 그들을 버린 자식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부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는다오태영의 부활 그 다음은 조금의 동정도 없이 결코 희망일 수 없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죽은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 태오는 엄마의 옆구리를 칼로 찌른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인다. “누가 부활을 증명하라면 여기 이 상처를 보여주세요..”라고. 그리고 태오는 말한다. “부활은 절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엄마도 이미 알고 있죠? 그래요 엄마, 중요한 건 부활 그 다음이에요 태오는 죽은 엄마의 입술과 상처, 못 박힌 발등에 입을 맞추면서 말한다. 엄마가 부활하면 엄마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갈 거라는 태오의 대사를 끝으로 막이 내린다.

 

 

 

 

 

오태영의 희곡을 읽으면서 그의 작품들이 가진 제목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희곡은 화가 뭉크의 그림을 닮았다. 엄마를 강간하고 엄마를 살해한 소년의 이야기, 치매 걸린 노파가 죽은 남편 옆에서 기도하듯이 묶인 채 죽어가는 이야기. 오태영의 부활 그 다음은 화가 뭉크의 그림 속의 사람처럼 절규하고 있다. 그 절규는 바로 우리 옆에서 뒤에서 위에서 울리고 있지만 우리는 듣지 못한다.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나가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 참담한 희곡을 읽고 여전히 내가 그 희곡 속 인물의 절박함을 느끼고 산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레이 효우가 말했듯이 물질적 기반과 이렇게 발언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무력한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도 있겠다.

끝으로 한마디 조심스럽게 덧붙인다면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의 형식을 취한 제의는 이제 불편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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