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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파우스터'

clint 2023. 3. 4. 10:28

 

2013년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김호연의 네 번째 장편소설 『파우스터』. ‘파우스터’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묵시록적인 조종과 감시, 젊음과 노욕이 충돌하는 현실을 은유하며 숨 가쁘게 펼쳐지는 장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다.

노인들이 거액의 돈을 지불하면 각자가 원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선택해 그들의 인생을 조종하며 대리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회. 이들의 관계는 파우스터와 메피스토 시스템이라는 지하시장에서 거래된다. 누군가를 감시하고 조종하는 것을 즐기는 늙은 권력자의 욕망은 끝까지 활활 타오르고, 이에 맞서는 청년의 저항 또한 필사적으로 펼쳐진다.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왼손 파이어볼러 박준석은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다. 내년이면 메이저리그 진출이 확실한 그는 오늘도 완벽한 컨트롤로 승리를 챙긴다. 게임도 자신의 인생도 스스로 컨트롤한다고 믿는 준석은, 귀갓길에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의식을 잃는다. 병원에서 눈을 뜨니 준석의 앞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여자 경이 “당신 머릿속에 거머리가 있어요”라는 말을 건넨다. 그녀는 그것이 준석의 시청각 후각 정보를 전달하는 특별한 연결체고, 진짜 흡혈귀는 그것을 통해 준석의 인생을 송두리째 공유하고 조종하는 어떤 노인이라고 말한다. 믿기 힘들어하는 준석에게, 경은 구형 대포폰을 건네며 연결체가 켜지기 전에 연락하라며 사라진다.
 태근은 독재정권의 편에서 여러 악법과 행정을 담당했고, 국회의장까지 거친 후 은퇴하여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10년 동안 태근은 한국에 ‘메피스토 코리아’가 설립되는 걸 은밀히 도왔고 초대 회원인 ‘파우스트 체’로 참여해 메피스토의 시스템 하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메피스토는 특수한 연결체를 젊은이의 뇌에 삽입해 그 젊은이의 삶을 자기 것인 양 만끽하는 시스템으로, 회원이 된 파우스트는 자신이 선택한 젊은이의 미래를 여러 가지 메피스토 시스템을 이용해 조종할 수 있고, 이를 가지고 경쟁하고 베팅할 수 있다. 65세 이상의, 권력을 지닌 노인만이 가입비 100억을 내고 들어오는 이 시스템은 철저한 비밀과 경호 속에 이뤄지는 그들만의 게임인 것이다. 경의 아버지는 지난해 죽은 선진그룹 회장 최형식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품인 책 한 권에서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됐고, 아버지의 죽음에 메피스토와 준석의 파우스트가 개입된 사실을 알게 됐다. 놈들을 찾아 복수하기로 한 경은 아버지의 기록이 담긴 그 책에서 알아낸 유일한 파우스터인 준석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 준석은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파우스트를 찾아야 한다. 경 역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준석과 힘을 합쳐야 한다. 두 사람은 이제 메피스토와 파우스트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고통스런 싸움을 펼쳐 나간다. 파우스터 준석은 메피스토와 파우스트로부터 빼앗긴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경은 복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준석에게 당신의 머릿속에 거머리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될 또 다른 파우스터 은민은? 늙은이들의 욕망이 만든 끔찍한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젊은이들의 자유를 향한 투쟁이 계속된다.

 

작가의 말

 20살 문청 시절, 문학의 성지에 노크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파우스트」를 집어 든 적이 있다. 그러나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꾸역꾸역 단어를 씹어보아도 전혀 삼킬 수가 없었다. 답답해 하는 내게 한 선배가 말했다. 「파우스트」는 마흔이 넘어야 읽는 거라고, 그 말에 한결 기분이 나아진 나는 헌책방으로 향했고, 20년 뒤를 기약하며 인류의 고전을 술값과 바꿨다. 그랬다. 까마득하다고 생각했다. 20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고, 알면 또 어쩌겠는가? 젊은 날은 태양이 세 개인 듯 언제나 눈부실 따름이었다.

마흔에 소설가가 되었다. 덜컥, 시나리오 작가로 여러 작품을 썼으나 좀처럼 영화로 완성되지 않던 중 어쩌다 보니 된 소설가였다. 이후 두 분야 모두에서 이야기를 쓰며 몇 해를 보냈다. 시나리오 작가로 쌓인 경력은 생계를 해결해주었고, 소설은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발표하는 자리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쓴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란 요원했고, 소설이란 것은 쓰면 쓸수록 어려운 미로 속 길찾기 였다.

2018년 가을, 운 좋게 카이스트 예술가 레지던시에 입주했다. 그곳에서 「고스트라이터즈」의 연재를 마친 뒤 미루고 있던 살만 루슈디의 「조지프 앤턴」을 집어 들었다. 거장의 엄청난 자기 이야기를 정신없이 읽어 나가던 나는 두 번째 챕터에서 딱 멈춰버렸다. 챕터의 제목은 'A Faustian Contract'였다. 파우스트의 계약, 순간 메피스토펠레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네가 진짜 읽기를 미뤄둔 책은 이 책이 아닐 텐데, 그제야 내가 마흔을 넘겼고, 소설가가 되었으며, 20년 전 인류의 고전 한 권을 헌책방에 팔아 치웠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시 「파우스트」를 읽었다. 여전히 힘들었다. 그래도 이젠 읽을 수 있었다. 읽다가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었지만 미소를 머금을 수도 있었다. 당시 머물던 카이스트에서 나는 이곳 학생들이라면 머리를 해킹하는 기술도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그 생각은 곧장 책 속 파우스트 박사와 메피스토펠레스를 소환했다. 지금 여기서 악마가 젊은이의 시청각정보를 해킹해 노인에게 제공한다면? 그렇게 악마를 통해 젊음을 얻은 노인들은 현대의 파우스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파우스트에게 젊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청춘의 이름은? 그들을 파우스터라고 부르면 어떻까? 빼앗긴 청춘의 이름을 파우스터라고 발음한 뒤 난 쓰기 시작했다. 시대의 공기를 품은 채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기술을 총동원했다. 긴장과 스킬을 잃지 않으려 애썼고, 캐릭터들이 외부 속에 답을 구할 때 나 역시 함께 협의 의미를 구했다…. 그렇게 <파우스터> 라는 소설을 쓰게 되었고 그 여정은 생각보다 더 멀고 구불구불하다 결국, 눈은 높은데 손은 비천하다고, 안 되는 실력으로 애만 쓰다 주저앉지 않나 두려웠다. 결국 쓰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라는 작품 속 대사처럼, 상상의 방황을 견뎌야 했고 글쓰기의 노고를 멈추지 않아야 했다.

초고를 끝낼 즈음인 2012년 가을, 왼팔과 왼 어깨 전제가 마비되었다. 매일 통증병원으로 출근해 한 시간쯤 치료를 받은 뒤 사무실로 향했다. 두 달 뒤 큰 병원에서 목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퇴행성이었고, 경추만이 아닌 요추에도 같은 증상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글쓰기에 힘이 붙었다. 작가생활 19년을 버티는 힘으로 살았다. 내게 재능이 있다면 필력이 아니라 인내력일 거라 믿고 살았다. 그렇게 내 글쓰기의 8할을 책임지던 버팀의 뼈대가 신음하자 모든 것이 생생해 졌다. 나는 퇴행성 척추를 구부린 채 작품 속 노인들처럼 젊음을 갈구했다. 통증 어린 뼈대를 곧추세우며 청춘의 끓는 자유를 갈망했다. 준석과 태근 사이에 내가 있다는 걸 실감했고, 중간에 선 채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 2019년 봄이 되서야 「파우스터」는 완성됐다. 끝냈다. 진짜로 장편을 완성한 느낌이었고 진짜로 「파우스트」를 완독한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 「파우스트」의 의미와 「파우스터」의 재미가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그러기 위해 노력한 작가의 안간힘이 조금이라도 엿보이길. 이 책이 고전의 분량만 따라한 게 아니라 그 내용에도 힘썼음을, 방황하는 인간에 대한 공감을 나누려 애썼음을 느낄 수 있길 희망한다. 아울러 작품 속 사건과 인물은 모두 허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실제와 전혀 상관이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파우스트」는 열린책들 세계 문학선을 읽고 인용했으며, 주인공의 직업인 야구에 대해서는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를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