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태웅 '불티나'

clint 2015. 11. 9. 18:17

 

 

 

 

대학을 같이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동참했던 일단의 무리가 지금은 고시에 실패하고 이혼하는 자, 동창끼리 결혼했지만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 개그맨이 된 변호사, 자살하는 자, 자살을 방조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절박하게 폭로된다. 작가의 정직한 자기 성찰을 부각하면서 아파할 줄 모르는 이 시대의 무감각, 파괴성을 예리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병수란 사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8년째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데다, 교사인 아내에게 얹혀사는 꼴이 되어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쓰라린 패배의식이지만, 알량한 자존심과 오기, 궁색한 자기변명 또한 만만치 않다. 아내 인옥과의 관계는 병수의 이런 이율배반적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에게 최대한 상처를 줄 작정으로 일부러 골라내기라도 한 듯한 온갖 멸시와 야유로 가득 차 있다. 아내는 번번이 고시에 떨어지면서도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을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으며, 정부가 있다는 사실도 전혀 숨기려들지 않는다. 병수는 병수대로 그런 아내를 자신 못지않은 속물로 간주하면서, 그녀의 불륜장면을 찍은 필름을 미끼로 해 그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아내에게 있어 병수는 ‘미친 놈’에 ‘좆같은 새끼’,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을 파렴치한’이고, 아내는 병수에게 있어 ‘씨발년’에 ‘개폼이나 잡고, 소비를 해야 살 것 같고, 시나 소설로 치장해야 살아있다고 느끼는 부르주아 쓰레기’일 뿐이다. 아내를 파괴해버리고 싶고 아내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갖은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그녀의 지갑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돈을 꺼내 나가는 병수의 모습에서는 최소한의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내를 부르주아로 몰아붙이는 끝에 세상의 부르주아들을 향해 퍼붓는 병수의 욕설에는 객관적 타당성에 앞서 낙오자로서의 그의 패배의식과 열등감이 더 많이 깔려있다. 확실히 병수는 속물에 가깝다. 그 스스로도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들지 않는다. 아내에 대한 그의 뜨겁고 절실했던 사랑을 말해주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이제 나이트클럽의 나타샤에게나 더 그럴듯하게 어울리게 되었고, 젊은 시절 철학도로서 품었던 근원적 고독이나 순수는 돈을 주고 산 여자에게서나 잠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또 시대니 고문이니 획일성이니 하는 이념적 단어들은 만나는 여자들이 도대체 유방수술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그의 호기심에 가려져 무의미해진다. 병수의 대사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무의미한 잡담들은 그 잡담들만큼이나 사소하고 가벼워진 그의 삶을 대변한다. 20대에 가졌던 꿈과 사랑, 이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로는 병수의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시에 패스한 동현, 변호사를 그만두고 개그맨으로 나선 윤재, 고시공부를 하면서도 아직까지 지난날의 이념의 끝자락을 놓지 않고 있는 추배, 고시에 실패한 충격으로 정신이상자에 거지가 된 나만이 그리고 사랑 없는 결혼에 시들어 가는 윤재의 아내 진숙과 병수의 아내 인옥.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들 모두는 삶에 대한 타협과 안주, 내지는 적당한 자기변명과 체념만이 전부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독립된 개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병수의 내면에 숨겨진 조각난 상처들과 치부들을 상징하는 기호들이다. 《불티나》는 비루한 일상 속에 갇힌 30대의 현주소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은 단순히 386의 정체성 문제나 이념부재의 현실을 운운하는 차원을 벗어나 보다 복합적인 내적 깊이를 확보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연극의 중심 모티프가 되는 ‘불’의 이미지를 풀어내는 작가와 연출가의 방식 덕분이다. 이 연극에는 병수의 라이터에서부터, 비즈니스클럽 이름, 강원도 산불, 과거 6월 항쟁 당시 시청 앞 광장을 수놓았던 불꽃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작가와 연출가는 이 불들을 자신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려는 병수의 의지가 담긴 라이터 주변으로 끌어 모음으로써, 일상이란 어둠 속에 가려져 병수조차 느낄 수 없었던 갈등과 고민의 실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즉 과거와 현재, 역사와 개인의 시각에서 직, 간접적으로 비춰주는 매개체로 활용하고 있다. 고시에 떨어진 병수는 잠깐 동안의 망설임 끝에 돈을 주고 라이터를 구입한다. 그러나 그는 이 라이터에게 처음부터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병수 : 라이터 간수도 못하는 놈이 뭔 놈의 고시냐? … 내가 이 라이터 가스 닳기 전에 잃어버리면 인간이 아니다. 그래 작은 일부터 마무리를 짓는 습관을 짓는 거야. … 내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쓰고 만다. 잃어버리는 날이면 고시고 뭐고 없다.
그는 라이터를 끝까지 쓰고 못 쓰고를 통해 남자로서의 위신과 자존심 뿐 아니라 자신이 과연 고시공부를 계속해도 될 정도의 인물이 되는지를 확인받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라이터는 주위의 비웃음과 내면의 패배의식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 된다. 그 때문에 병수는 라이터에 극기정진(克己正進)이란 이름을 붙여주는가 하면, 변기에 빠졌을 때에는 드라이기로 말리고, 행여 잃어버릴새라 전전긍긍하는 등 유별난 애착을 보인다. 그리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하필이면 일회용 라이터를 통해 확인하려는 병수의 모습은, 전자의 무거움이 후자의 더없이 사소한 가벼움과 충돌하고 어긋나는 가운데 묘한 비극성을 자아낸다. 동현의 사시 패스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술자리에서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이 친구에서 저 친구의 손으로 넘어가는 병수의 라이터는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불들을 불러낸다. 6월 항쟁 때 시청 앞 광장을 수놓았던 불꽃, 분신자살하던 친구의 몸을 뒤덮었던 불꽃, 즉 젊은 시절 그들을 뜨겁게 에워쌌던 혁명과 이상의 불꽃이다. 병수와 그의 친구들은 그 불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병수 : 그것이 너희들의 불꽃이라면 우리도 불꽃은 있다. 시청을 가득 메운 인파들, 하늘에서 뿌려지는 유인물들 … 아 뜨겁다. 속에서 올라오는 이 불길을 주체할 수 없…. 어둠이 깔린 시청, 광화문, 종로, 수많은 라이터 불이 반짝인다. 승리의 불꽃이 반짝인다. 수천수만의 불꽃들이 반짝인다. 이렇게, 이렇게!

 

 

 


그러나 이제 그들은 ‘불꽃’이라는 비즈니스클럽에서, 술집 유희들의 현란하고 감각적인 ‘불꽃 쇼’에 흥분하며, 또 ‘러시아의 불꽃’ 나타샤를 안고 뒹군다. 그런 그들에게 과거의 불꽃들은 더 이상 뜨겁지도 감격적이지도 않다. 그나마 오직 추배만이 그 뜨거운 불들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한다. 그는 현실 속에서 무의미하게 흐트러져 가는 자신들을 추켜세워 보지만 ‘냉소와 무관심, 수다와 잡담, 너스레, 원칙이 없으니까 웃고 떠드는’ 것이 전부인 친구들에게 그의 이런 생각은 ‘고시에 떨어진 패배자’가 혼자 ‘고상 떠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동현과 추배의 대립 장면은 현재 속에서 그들 과거의 불이 얼마만큼 퇴색되어버렸는지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동현이 보기에 과거 혁명과 젊음의 불꽃은 오히려 획일적 사고만을 강요하던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 추배는 더 이상은 그 뜨거운 불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현실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명백한 패배자이고, 지난날의 기억은 어찌 보면 자신이 패배자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애써 놓지 않으려는 자기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추배에게 남겨진 것은 더 이상 지니기 버거워진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패배까지 모든 것을 태워 없애줄 죽음의 불 뿐이다. 추배가 선택한 분신은 더 이상 영웅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그의 분신은 희망을, 이념을, 아니 불꽃을 간직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또 다른 타협 내지 체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분신이 고작 근처에 있던 단독주택만 태울 정도의 사건 밖에는 되지 못한다.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강원도 산불이 밤사이 진화된 것처럼 병수의 라이터 주변에서 쉬지 않고 나타났던 과거의 불꽃들은 추배의 죽음을 끝으로 현실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병수는 잃어버린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룸살롱을 찾아가 지난밤에 있었던 이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면서 자신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던 과거와 현재의 삶의 모습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라이터를 다시 찾은 병수는 비로소 ‘줄곧 이미 만들어진 제도에 기를 쓰려고 들어가려’ 함으로써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 없이’ ‘늘 버려진 것 같고 모자란 것 같고’ ‘세계의 노예’이면서도 ‘노예 주제에 욕심만 많았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세계란 ‘따로 있어 거기에 들어가야 할 곳’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아내에게 필름과 집문서를 순순히 돌려줄 수 있고 또 진심은 아니지만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다. 그리고 아직 라이터 가스가 남아있음을 확인하면서 ‘약간의 선의와 상상력’, ‘약간의 숨 돌릴 여백만 있다면’ 삶은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누라도 가고 친구도 가고 남은 것은 개그’ 뿐인 시대에 그 라이터가 병수로 하여금 얼마만큼 삶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게 해 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불티나》는 386세대의 작가와 연출가에 의해 만들어진 386세대의 이야기이다. 20대에 품었던 투철한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30대의 비루한 일상 속에 매몰되어 버렸다는 자괴감은 386세대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불티나》에는 이런 386세대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흔히 그렇듯 이념적이거나 감상적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한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일회용 라이터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되, 다시 이 라이터 주변에 한국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상징하는 수많은 불들을 켜놓음으로써 결국 이 두 차원이 안고 있는 문제와 고민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보여준다. 퇴폐적인 듯하면서도 우울한 연기를 다양한 템포로 보여준 전수환은 불안한 패배자인 병수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다만 윤재의 경우 개그맨이라는 직업적 특성을 연기로 나타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 개그만이 판을 치는, 수다와 잡담만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은유로 그를 등장시킨 것이라면 보다 차별화 된 연기를 보여주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어두운 조명과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듯, 고함을 치는 듯한 ‘어어부 프로젝트’의 절규에 가까운 노래들은 병수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이면에 가려진 우울과 고독을 잘 표현해주었다. 단순하게 처리된 무대는 그 텅 빈 공간이 갖는 상징적 표현력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작품 속에 녹아있는 구체적인 역사성의 문제를 무리 없이 감싸 안을 수 있었다. 다만 현란하고 관능적인 쇼걸들의 불꽃 쇼 장면은 현대의 감각적이고 퇴폐적인 소비문화와 성문화를 보여주려는 시도로 보여 지긴 했으나 연우무대의 좁은 공간에서는 좀 과분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성냥팔이 소녀라든지, 나이트클럽에서 병수에게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을 재현해내는 장면, 다음 날 나이트클럽을 찾아간 병수 앞에 고무장갑을 끼고 심한 사투리를 쓰며 나타난 나타샤, 느릿느릿 무대를 지나가는 거지의 모습 등은 연출 상 가미된 부분들은 연출가의 독특한 색깔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