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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 '검은 수사'

clint 2023. 1. 18. 15:54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 박사 꼬브린은 친구로부터 시골에 가서 쉬라는 말을 듣고 빼소쯔끼의 과수원으로 내려가게 된다. 빼소쯔끼는 지역의 꽤 커다란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는 사내로서 현실적인 인물의 전형처럼 보여 진다. 그의 딸 따냐 또한 평범한 여성으로 꼬브린을 흠모하고 있다. 꼬브린은 시골의 생활에 조금씩 만족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타냐와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꼬브린은 들판에서 '검은 수사'를 보게 되는데, 그는 꼬브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천재이며,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 내려온 사람이며, 신에게 선택된 자이다. 당신처럼 피로, 신경쇠약, 불안을 떠안고 사는 사람들로 인해 인류의 미래는 한없이 밝아질 것이며, 그런 것들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뿐이다.' 라는 말. 이것은 꼬브린의 신경쇠약 증세에 따른 헛것을 보는 걸로 그려지지만, 사실상 작가(체호프)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꼬브린은 결혼 후에, 검은 수사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다. 같은 침대에 잠들던 아내 따냐가 밤중에 일어나 헛소리를 하는 꼬브린을 보고는 신경쇠약 약을 먹이고, 휴식을 취하게 하고, 연구나 일 따위를 심하게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꼬브린은 이내 정상으로 돌아가지만 본인은 극심한 우울증과 무력감, 패배감에 휩싸이고 만다. 결국 그는 장인어른을 모욕하는 언행을 일삼고, 따냐를 불행에 빠뜨리고 이혼을 하게 된다.  따냐와의 이혼 후 새로운 여인과 함께 결혼하여 낯선 지방을 여행하던 꼬브린은 새벽에 오랜만에 나타난 검은 수사를 보고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되는데, 그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검은 수사에서 독자들은 절대의 진리, 궁극의 진리를 갈구하는 학자 꼬브린을 만난다. 궁극의 거창한 진리를 추구하는 꼬브린은 환각인 검은 수사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렇지만 그러는 사이 그의 실제 생활과 생명은 망가져간다. 그뿐 아니라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과 생명 역시 망가져간다. 하찮고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진 실제의 삶이 거창한 궁극의 진리와 그 추론의 세계에 의해서 붕괴되는 것이다.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넘어서 존재하려는 거창한 세계는 실제로 살아가야하는 삶의 세계를 파괴한다. 그럼에도 그것에 만족해하는 꼬브린의 죽음을 보면서 아이러니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진리가 가치를 지니려면 현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꿈을 찾아 쫒는 이의 거침없는 질주와 그로 인한 파멸, 현실에 적당히 안주하는 이의 권태와 무기력함. 이 둘 모두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삶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둘 중에 하나를, 혹은 둘을 적당히 섞은 삶의 양식을 선택한다. 의식적으로 알든, 모르든 간에 이 둘 사이를 저울질하며 사는 것이다. 이 둘 사이를 잘 조절하지 못해서 불행하고 고통 받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건 인류의 역사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패턴이 아닐까 싶다. 체호프는 이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질문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는 자신이 꼬브린의 삶을 선택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죽음을 맞고도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꼬브린의 모습에서 체호프의 생각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