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홍도 '컬럼비아대 기숙사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동양인 임산부와...'

clint 2020. 1. 2. 15:11

 

 

2020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당선작

 

 

 

 

심사평

올해 신춘문예 희곡심사는 희곡을 공연을 전제로 한 설계도로 보는 관점에서 출발했습니다. 따라서 장면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과 가능성의 유무를 중요한 요소로 보았습니다. 또한 주제와 소재 면에서 얼마나 작가의 독창적인 시선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독창적인 언어로 구현해냈는지에 집중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요소들을 담아내는 새로운 희곡과 연극 형식에 대한 구체적이고 완성도 높은 제안에 기대를 가지고 심사에 임했습니다.

2020년도 응모작들은 청년들의 구직난과 경제생활,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SF 등 몇몇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긴 하였으나 예년에 비해 주제와 소재가 비교적 고르게 다루어져 점차 창작의 시선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형식의 다양성과 영리한 변주를 보이는 몇몇 작품들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단순히 장면의 재현을 기술하는 형식에서 벗어나, 형식적 장르적 전형성을 자유롭고 예리하게 넘나들고 교직하여 작가의 시선과 의도를 명료하게 구현하는 사례가 보였습니다이러한 과정 끝에 심사위원들은 이홍도 작가의 컬럼비아 대 기숙사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동양인 임산부와 현장에서 도주한 동양인 남성에 대한 뉴욕타임즈의 지나치게 짧은 보도기사를 반갑게 발견했고, 기꺼이 올해의 신춘문예 희곡작품으로 선정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창조해낸 가공의 세계와 작가 자신의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동시대 창작자로서의 자기참조뿐 아니라 희곡과 연극, 예술과 문화권력, 심지어 신춘문예에 대한 참조까지 작품 안에 녹여내는 과감한 메타연극의 설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창작자로서의 막막함과 혼란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여러 층위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구조와 구성의 경쾌함으로 연극의 유희적 균형을 맞추는 영리함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대 연극의 형식적 진화를 희곡의 영역으로 구현해냈다는데 큰 미덕이 있었으며, 문학적인 면으로도 희곡의 다양한 형식적 진화에 좋은 징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쉽게도 최종 선정되지는 않았으나 길게 논의되었던 작품으로는 낯선 해변에서가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정교한 대화와 정지를 통해 인물의 정서와 행동을 담담하게 드러내면서, 각각의 장면에서 차근차근 쌓아 올려 진 공감각적 요소가 결말에 초현실적 이미지로 발산되는 완성도 높은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역시 정교한 대화와 행동, 장면전개를 통해 인물들의 섬세하고 치명적인 심리변화에 몰입하게 되는 높은 완성도의 연극을 설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상화와 소재주의의 위험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청소년을 응시한 작가의 깊은 시선이 돋보였습니다. - 연극연출가 문삼화, 박해성

 

 

 

 

당선소감

파운틴헤드때의 일입니다. 담당하는 기획 분께서 공연자막을 번역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쭤봤습니다. 원래 자막번역도 하셨냐고. 프로그램에선 이름을 못 봤는데. 그랬더니 하신 말이 이거였습니다. 홍도, 그림자가 될 줄 알아야 돼. 그래야 공연이 올라가지.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무대, 조명, 음향, 영상, 의상, 소품, 분장, 배우, 연출, 안무, 극장운영, 기획, 홍보, 마케팅, 비평, 매체, 제작, 업체, 재단, 기관. 그런데 그 많은 이들 가운데 저 혼자만 이렇게 말할 기회를 가져도 되는 걸까요? 공연이란 것이 얼마나 올라가기 어려운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책임과 헌신을 요구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어떤 글도 함부로 써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현장으로 나간단 느낌이 있습니다. 올해 1년 동안 주로 대본작업을 하면서 소속 없이 지냈던 터라 괜히 새삼스럽습니다. 그 전까지 일을 하면서 느꼈던 감사함과 죄송스러움을 혼자 있는 내내 곱씹어왔습니다. 맞아. 그땐 그랬지. 공연이 뭐라고. 공연이 뭐길래. 앞으로 한 번 더 잘 부탁드립니다. 다들 극장에서 또 만나요.

20164, 한 줄의 제목 떠올랐습니다. 거기서 작업은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38개월 동안 계속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바뀌어갔습니다. 무척 부족한 작업들이었고 결국은 다 지워 없앴습니다. 이번에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작품도 마감을 앞두고 형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맞는 선택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 버려질 대본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내내 두렵고 긴장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목만은 단어 하나 바뀌지 않았습니다. 처음 순간 떠올랐던 한 줄 그대로입니다. 이제 그 제목이 무엇인지 이 당선 소감을 읽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쓰면서도 스스로 많은 한계를 느꼈습니다. 다시 펼쳐 봐도 허점이 가득한 대본입니다. 작품이 거칠고 제멋대로다 보니 심사위원 분들도 고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겠습니다. 어서 빨리 이후 작업으로 새 출발하겠습니다. 저는 연극학교도 나오지 못했고 대학극회 출신 또한 아닙니다. 극단에 소속된 적도 없습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연고 없는 저를 대가 없이 환대해주셨던 분들 덕입니다. 동작구 상도동,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 뉴욕 주 플러싱, 중구 장충동, 강남구 역삼동, 서초구 잠원동, 성북구 동소문동, 종로구 동숭동. 그곳에서 들었던 한 마디 말의 온기가 제게는 내내 갚지 못할 빚이 되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홍도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