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한민규 '월화'

clint 2019. 12. 26. 10:51

 

 

 

일제강점기 당시 연극판은 남성 중심이었고, 그 속에서 배우는 기생과 같은 천대를 받는다. 아니, 실제 인식 자체가 기생은 여배우였다. 오죽하면 여배우가 필요할 때 기방에서 구했다는 말을 하겠는가.

<월화>는 이월화가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서, 진정한 月華가 되는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내적 욕망, 여배우도 배우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전환을 위해 세상의 시선에 맞서 싸워야 하는 고독한 혁명가 같은 모습에 중점을 둔다. 여전히 배우가 아닌 여배우라고 불리는 작금의 현상에 이월화의 목소리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연극 <월화>가 내재한 힘이다. 하지만 이월화와 혁명의 연결고리가 분명하게 전달될까? 이 물음의 답은 선뜻 내리기 어렵다. 인물의 성격이 단선적으로 보이는 경향이 강할수록 그 인물의 욕망과 동기는 설득력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배우다라고 외치는 이월화는 보이지만, 이런 모습이 투사의 모습처럼 보이는 점은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아쉬움은 떨칠 수가 없다. 이월화에게 필요한 것, 정말 혁명의 꽃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짜 月華가 되기 위해서는 그 존재 하나만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월화>의 흥미로운 점은 최성혜-복혜숙-이월화의 구도였다. 민중극단의 <영겁의 처> 주인공 오디션 당시, 신극이 추구하는 연기 스타일에 얼마나 부합하는지에서부터 드러난다. 최성혜는 철저히 탈 언어화된 상태에서 움직임만 보인다. 이유는 간단했다. 태초의 인간은 말이 아닌 몸짓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2010년대라면 최성혜의 움직임의 연기가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바야흐로 1920년대, 신극의 출발이자 중심의 연극을 추구하던 때였기에 최성혜가 보여준 움직임의 연기는 인정받기 어렵다.

복혜숙은 최성혜와는 달리 언어의 연기를 선보인다. 그러나 뭔가 뒤섞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연기이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집을 나가기 전의 장면을 연기하지만, 과장된 몸짓과 신파조의 억양을 버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복혜숙이 오디션에서 선보인 연기는 신극이 추구하는 언어의 연극과 신파극의 중간 어디쯤에 있으며, 최성혜와 이월화의 중간에 위치한 연기 스타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본 이월화. 그녀는 신극이 추구하는 연기 스타일에 부합했다. 자신의 일기를 각색해 그야말로 언어의 연극을 선보인다. 어떤 움직임도 아닌, 말로 감정을 담아 전달한다. 말로서만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고, 감정이입을 시키는 월화의 연기. 그러니 신극 <영겁의 처>의 주인공은 이월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디션의 심사위원들이 이들의 연기에 보인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최성혜의 연기가 끝나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복혜숙의 연기를 보고선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그러다 이월화의 연기를 본 그들은 단번에 주인공으로 결정해버린다. 결국 이월화의 연기는 그들이 인정하는, 그래서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빛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최성혜는 누구의 인정도 받지 않는 어둠으로 월화의 대척점에 위치하는 셈이다. 그러면 복혜숙은 이 둘의 중간 어디쯤에 서 있다.

 

 

 

 

 

이러한 일직선으로 흐르는 구도는 여배우로 살아가는 방식에도 드러난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하룻밤을 허락할 수 있는 최성혜와 이러한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고 있는 복혜숙, 그리고 이들의 생각에 철저히 반대하는 이월화는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오는 직선상에 위치한다. 물론 월화의 생각과 태도는 당연히 옳다. 하지만 월화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보일수록, 월화와 반대에 있는 두 여성에게 눈이 갈수록 홀로 고고한 학처럼 서 있는 그녀의 존재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세 명의 여배우를 직선상에 위치해두고 과연 <월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월화, 왜 그녀는 여배우가 배우가 되는 순간을 바란다는 점을 강조했을까? 자신이 죽는 순간에도 마치 자신이 죽고 난 이후의 어떤 시점에는(이 시점은 우리가 사는 지금-현재를 말하는 듯하다) 이 순간이 도래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하듯이 말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연극 <월화>이월화라는 인물의 삶에서 화려한 꽃으로 만개해가는 시점, 여배우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그 시간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조선 최초의 이월화의 배우로서의 삶을 보여주려면, 이월화를 둘러싼 박승희, 윤백남, 왕평렬, 그리고 복혜숙, 최성혜와 보다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인물의 성격이 심층적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극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존재가 매력적이어야 관객들도 무대 위 사건에 몰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러지 못하다. 그 예로 9년이 지났다는 자막으로 대체된, 즉 이월화가 왕평렬을 죽이고 난 이후 그녀가 중국으로 건너가 겪어야 했던 명백한 의 시기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삭제된 시간은 9년 이후 조선에 다시 나타난 월화의 말로서 대신한다. 결국 무대 위 월화의 은 그녀의 말, 남루한 행색, 병든 몸으로 전달할 뿐이다.

본연의 모습인 이정숙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월화가 진정한 月華가 되려면, 어둠과 밝음이 공존해야 한다. 어둠이 있어야 밝음을 알 수 있고 밝음이 있어야 어둠을 알 수 있듯이, 이월화는 이정숙과 함께 공생해야 한다. 이월화가 이정숙을 포용하고 있음을 보여줄 때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의 공존은, 즉 이정숙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은 이정숙이 이월화가 되기 직전 민중극단 <영겁의 처> 주인공 오디션에서 자신의 일기를 각색한 연기를 보여주었을 때, 죽기 전 이월화의 삶에서 한발 떨어진 상태에서 자신이 월화로서 만났던 사람들이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 두 곳이었다. 그 외의 장면은 이정숙이 고개를 들기 전 항상 이월화가 우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하는 점은 존재한다. 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의 존재. 이것이 이 연극이 공연될 수 있는 강력한 이유이다.

 

 

 

 

작가의 글

작가로서 기필코 월화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2015년 가을이었다. 그때 고려대에서 이상우 교수님의 수업으로 이월화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는데 이월화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반가움보다는 슬픔이 더 컸다. 내가 느낀 이월화의 첫인상은 변혁과 혼돈의 시기에 피어난 혁명의 꽃으로 비극적 운영을 맞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시대를 변혁과 혼돈의 시기라고 느꼈을까. 현재의 내가 바라보는 이월화가 배우 활동을 했던 1920년대는 서양의 문화 및 문학들의 교류로 신극을 펼치는 토월회, 그리고 근대문명의 아이콘으로 보는 카메라의 도입으로 조선 최초 극영화의 도입, 근대의 산물로 보는 낭만성의 아이콘 기차’ ‘모던걸과 신여성, 모던보이들이 공존하던 시기, 한복과 양복이 교차되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변혁보다도 내게 혼돈의 아픔을 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는 일본이 조선을 수탈한 암흑기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대에 이월화는 조선 근대 최초의 여배우로 조명 받았지만 그만큼 철저히 제도로부터 이용당한 후 버려지게 되어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이월화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찬란하게 빛났던 시절은 짧게 느껴졌으며 그녀가 나락으로 떨어져 30대 초반의 나이에 운명을 맞이하는 비극적 시절은 길게 느껴졌다. 또한, ‘이월화가 변혁과 혼돈의 시기에 빛과 그림자로 살았기 때문인지, 오늘날 대중들은 그녀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슬펐다. 어쩌면 이것이 창작 욕망을 더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월화는 나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조선 최초의 여배우, 최초의 신극 여배우, 조선 최초의 극영화의 주역이라는 이룬 업적에 비해 너무도 비극적 삶을 살았던 월화의 모습이 눈에 쓸쓸하게, 그리고 고독하게 아른거렸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비극적 삶보다 한 가지 내 가슴 속에 더 갚이 파고든 것은, ‘여배우는 배우로 대접받지 못했던 시절, 여배우는 기생보다도 천대받던 그 시절에 여배우의 시대를 열었던 혁명적 월화였다. 그래서 다른 어떤 모습보다도 그 모습에 주목했고, 그 모습으로 월화(月華) - 신극, 달빛에 물들다를 창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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