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성준기 '수갑'

clint 2019. 12. 21. 18:42

 

 

 

성준기의 희곡을 읽다보면 하나같이 소재의 획일성이다.

부초처럼 떠도는 민중의 질펀한 삶, 그 자체를 특유의 걸죽한 육담과 빠른 템포의 사건전개, 짜 맞춘 듯한 클라이맥스와 반전과 결말은 희곡 읽기에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성준기 희곡이 갖는 가장 큰 성과는 희곡 읽기의 난해성과 복잡성 그리고 등장인물의 다양성으로 인한 극 흐름의 단절을 극복하고 눈에 훤히 들어오는 무대와 쏘아부치는 듯한 대사의 짧고 견고함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다작의 작가로 희곡을 어렵지 않게 쉽게 쓰고 있다는 점이다. 성준기 희곡의 특징을 딱히 규정한다면 블랙코미디 계열의 리얼리즘작가이다. 그의 작중인물에서 풍기는 가학적 삶의 일단은 파라노이드 퍼스낼리티(Paranoid personality) 즉 편집성 인격 장애를 가진 특이한 의식구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과장된 섹슈얼리티와 끔찍함을 예감케 하는 극적 텐션은 마치 페르난도 아라발의 희곡에서 느끼는 섬뜩함과 마조히즘적 유희를 떠올리게 하며 바로 이런 작가의식이 희곡을 지탱해 주는 독특한 드라마 트루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 수갑은 한 살인범이 평온한 노부부의 집에 숨어들며 시작되고 있다. 잔혹한 살인범이 사건현장 부근의 일반주택에 숨어들어 노부인과 대화를 시작하며 막이 오르는데 노부인은 성경을 늘 가까이 두고 읽는 독실한 신자로 갑자기 나타난 인적 재난을 아주 소름끼치도록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만약 노부인이 겁을 먹고 소릴 지른다던지 아니면 경찰을 부른다면 극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해 파국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노부인은 권총을 들고 한손에 수갑을 찬 사내를 오히려 꾸짖고 준엄하게 타이르곤 한다. 어머니 같은 노부인의 예상 밖의 침착함은 사내의 마음을 돌리고도 남을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집안에는 노부부만이 사는 것처럼 설정하여 극이 진행되는데 하나 둘 가족들이 살인마의 함정에 자연스레 빠져들 수밖에 없다. 노부인은 남자의 죄를 미워할망정 인간의 원래모습은 선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초인종이 울리면 가족을 아무 망설임 없이 차례대로 문을 열어주고 있다. 여기서 독자나 관객들은 노부인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인마의 함정으로 들어오려는 가족을 돌려보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노부인은 인간을 믿기에 남편과 아들, 딸을 인질극의 현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내는 인질을 풀어줄 듯하면서도 비를 전제로 미루기만 한다. 결국 비가 내리지만 탈출을 전제로 딸을 인질로 데려가려고 한다. 이런 극적 상황으로 인해 긴장감은 계속 팽팽히 유지되고 있다. 사내의 이러한 행동 역시 편집성 인격 장애가 원인이 되어 진다.

사내는 자신의 팔목에 채워진 수갑을 풀기 위해 줄 톱을 구해오라고 명령을 내린다. 집안에 인질로 잡혀있는 노부인과, 노인, 아들은 비가 내리면 풀어 주리란 희망 하나로 비가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끈기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게 하는 힘은 비가 오면 인질을 풀어주고 나가겠다.” 라는 사내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 둘 걸려드는 인질에 대한 안타까움은 대조적으로 긴장감을 더해주며 위기의 상승곡선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십여 년 전에 벌어졌던 탈옥수들의 인질극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연상케 하는 수갑은 주제를 깊이 생각하거나 충격적인 메시지를 귀납적으로 풀어보려는 노력을 불식시키고 있다. 그것은 이 희곡이 사건위주의 진행을 하며 네 사람의 가족인질이 하나 둘 집안으로 들어와 뜻하지 않은 인질이 되어가는 과정이 계산된 플롯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런 종결부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말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마지막 등장인물인 딸이 등장하면서이다. 이 작품이 블랙코미디에 속하는 이유는 노부인의 캐릭터에 있다. 자식처럼 믿었던 사내가 급기야 비가 오는데도 가족들을 풀어주지 않으며 딸아이를 인질로 잡고 탈출하려는 불손한 의도를 직면하면서 급기야 서투르게 총을 쏴 자신의 딸을 죽이고 마는 비극적 결함 즉 하마르티아가 노부인의 캐릭터에 깊숙하게 실려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창조에서 노부인의 성격을 침착하면서도 분위기 적이고 이해성이 있으며 신앙심이 깊은 늙은 부인으로 설정되었지만 그 성격으로 말미암아 딸을 죽이는 비극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사내의 성격 또한 믿음과 살인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적인 면과 동시에 편집성 인격 장애를 가진 이중인격자로 설정하여 끝내 파멸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극의 전제가 떠오르지 않고 표면에 머물러 독자에게 공허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강한 메시지의 부여는 극이 추구하고 도달하려는 목적일진대 성준기의 희곡은 그냥 한편의 박진감 넘치는 수사 극을 본 듯한 느낌을 주곤 한다. 성준기 희곡에는 주제의 암시와 제시가 필요치 않게 하며 적당한 메타포와 이미저리를 사용하지 않고 리얼리티 그대로를 관객이나 독자에게 여과장치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준기 식의 드라마 트루기가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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