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방에 빨간 컵을 넣고 다니는 소녀. 로프에 묶인 빈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내와 남편. 맨발에 양산을 쓰고 허공을 걷는 여자. 격렬히 키스하듯 뺏고 뺏으며 물을 마시는 남자들. 빨간 하이힐 한 짝을 신고 우산을 짚은 노파. 상처 입은 짐승이 서로를 핥듯이 몸을 섞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손잡이가 부서진 수도꼭지에서 가늘게 흘러나오는 물줄기. 10명의 인간 군상들은 수돗가 주변을 걸으며 물을 탐하고, 서로를 경계하며 훔쳐보고, 격렬히 빨래를 하기도 하고 몸을 섞기도 한다. 그리곤 각자가 짊어진 짐들을 버리고 길을 떠난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 자리엔 버려진 물건들로 이루어진 검은 산.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 떨어지는 소리와 침묵과 간혹 흐르는 음악이 있을 뿐이다.

오타 쇼고는 일본 현대 연극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관념적인 대사 없이 철학적 깊이를 담보하면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리얼하게 묘사한 ‘침묵극’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물의 정거장>은 오타 쇼고 원작의 3가지 정거장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다. 10명의 주인공들(양산 든 여자, 아내와 남편, 노파, 소녀, 남자와 여자, 빨래하는 여인 등)이 등장하지만 물 소리와 간혹 흐르는 음악 외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삶을 그리고 있으며, 동화처럼 해피엔딩의 결말보다는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살다 보면 느리게 걷는 순간이 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무릎이 ‘퍽’하고 꺾이기도 하고, 목적지를 잃어버려 멍하니 서있기도 한다. <물의 정거장>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느리게 걷는 순간을 현미경처럼 세밀히 들여다 본 연극이다. 10명의 주인공들은 희망 때문에 걷지만, 바로 그 희망에 발목이 잡혀 절망하고 늪에 빠진다. 하지만, 늪에서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시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다고 동화처럼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결말이 아닌, 절망하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는 마치, 커다란 원을 빙글 빙글 도는 인생의 모습을 그려낸다.
<물의 정거장>은 오타 쇼고 원작의 3개의 정거장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며 <모래의 정거장>, <땅의 정거장>이 있다.

비좁은 계단을 따라내려간 공간은 어둠에 갇혀있다. 극단 측의 안내에 따라 군데군데 희미하게 켜진 조명 속을 더듬어가며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비로소, 지하공간이 어렴 풋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공연은 공간 전체를 무대로 삼고 있는 바, 관객은 지시에 따라 이곳저곳 바닥에 앉거나 혹은 턱 위에 걸터 앉으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공연에 대한 소통 의 통로를 마련한다.
배우들이 군데군데 다양한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 무거운 침묵이 어둠의 두께에 실려 낮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과 어둠의 공간 속에서 유독 공간 중 앙에 자리잡은 수도가 남다른 조명을 받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수도꼭지에서는 연신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이 공연에서 불이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작동하게 될 것임을 일찌감치 인식하는 순간이다.
〈물의 정거장〉은 그때그때 양은 다르지만 공연 내내 수도꼭지에서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물을 중심으로, 각각의 인물들이 물과 맺는 다양한 관계들을 오로지 배우들의 무겁고 느린 몸의 움직임으로 형상화해낸다. 여러 배우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내는 삶의 화두들이 한결같이 우울하고 고독하며 절망적일 수록, 공간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물은 더없이 신선하고 소중한 생명의 원천으로 부각된다. 가난이었건, 고독이었건, 아니면 극심한 소외와 단절이었건, 각 인물들이 그 물에 대해 빚어내는 각양각색의 움직임 속에서, 물은 때로는 매우 육감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아름다웠던 지난 젊음의 추억으로, 고단한 일상의 고통을 씻어줄 희망과 같은 무엇으로, 그리고 박제된 인류의 역사에 대한 기억으로 연신 그 상징적 질감을 바꾼다.
작가 오타 쇼고는 자신의 희곡에다 대사를 지워버린 대신, 그 자리를 배우들의 움직임을 서술하는 지문만으로 가득 채워 넣었다. 지면 위에서 그는 연극의 주제를 인물들의 언어가 아닌 행동의 지문을 통해 지시하고 있는 셈이다. 희곡의 문학적 언어에 질식되어 연극이 본래적 연극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들어야 만하는 상황에서, 작가로서 무대 라는 입체적이고 물질적인 공간을 지면에 담고자 했던 오타 쇼고의 노력은 그 자체로서 매우 새로운 실험이다. 그래서 그의 연극적 작업은 멀게는 60년대 일본 앙그라 운동의 핵으로, 가깝게는 최근 '조용한 연극'의 화두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문제는 그로부터 다시 십 수년이 지난 오늘날 내게는 희곡언어에 대한 오타 쇼고의 이같은 실험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대를 심하게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 는 의구심을 준다는 점이다. 연극적 상황을 무대에 공간화시키는 것이 연출자와 배우의 몫이고, 이것은 다시 관객으로 연장되며 궁극적인 의미화의 과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라 면, 작가 오타 쇼고는 이러한 각각의 몫들 조차 자신의 희곡 속에서 미리 선취하여 결정짓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오타 쇼고 자신이 이미 작가인 동시에 연출인이상, 이러한 문제는 그의 선에서 충분히 해결,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2차원의 평면에 갇힌 행동을 삼차원의 공간 속에 풀어낼 수 있는 힘을 이미 그는 글쓰기 단계에서 부터 갖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그의 작품이 이번 경우처럼 전혀 다른 연출가에 의해 공간화되는 경우이다. 김아라의 <물의 정거장>에서 대사를 지워버린 배우들의 몸은 의도와 달리 그 자체로서 고유한 질감을 확보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 예컨대 배우들은 희곡이 제시하는 대로 지극히 약속된 연극적 틀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이미 정해진 극적 주제를 정확하게 재현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느리고 절제된 움직임에서는 일상의 고통과 무 울이 그들만의 고유한 질감으로 묻어나기 보다는, 시종일관 기계적으로 상황을 나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무거운 미불짐, 쌀가마니, 여행가방, 기 다란 밧줄에 묶여 있는 유모차, 노란 우산 등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신선함 조차 상실한 이 시대의 진부한 화두와 맞물리면서, 일찌감치부터 관습적인 틀에 갇힌 익숙한 오브제 들로만 남을 뿐이다. 배우들의 동작부터 조명에 이르기까지 그 요소 하나하나 사이에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미 정해진 정확한 약속들이 작동하고 있다. 예컨대 언어를 걷어 낸 자리에서 배우들의 몸은 그것 자체로서 독립된 물질적 표현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언어를 보완하기 위해 그 이상으로 강하게 작동하는 기계적인 약속 에 꼭꼭 갇혀 경직되어 있었다. 그 몸은 그 자체의 독자적 존재감을 상실한 채, 이미 완성된 희곡의 체계 및 그 주제를 전달하는 수동적인 매개체이다. 잘 다듬고 정리한 양식적인 상징들만 보인다. 피아노 선율은 이 공연 자체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침묵의 의미를 이유없이 망가뜨린다. 오히려 공연 내내 쉬지 않고 흐르는 수돗물이 때로는 양을 달리하면서, 때로는 배우 들의 다양한 움직임과 섞이면서 변주해내는 소리들에 보다 주목하고 생산적으로 발전시켰으면 하는 아쉬움도 가져본다. 그랬더라면 공간 중앙에 놓인 수도와 수돗물은 단순한 상징적 층위를 넘어서서 물질적인 표현가능성까지 담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괴테 원작, 김기열 재창작 악마의 유혹' (1) | 2019.11.09 |
|---|---|
| 필립 풀먼 '알라딘과 요술램프' (1) | 2019.11.09 |
| 허지핑 '천하제일루' (1) | 2019.11.07 |
| 윤성호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1) | 2019.10.17 |
| 사천성천극원 전승 '수유기' (1) | 2019.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