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웨이밍룬 '반금련'

clint 2019. 10. 15. 19:11

 

 

 

이 작품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신시기의 시대정신과 천극 현대화의 성과를 담아낸 대표작으로, ‘어느 여인의 타락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반금련이란 중국의 고전소설 <수호전(><금병매>에 나오는 음탕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대명사로 간주되어 극작품의 제재로도 꾸준히 활용되어 왔다. 특히 1928년 어우양위첸이 5막 화극 반금련으로 각색하기도 했는데, 여기에서는 전통의 속박에 반기를 들고 개성 해방과 혼인의 지유를 추구하는 신여성의 전형으로 당시 230년대의 시대정신에 걸맞게 그려져 있다. 그러면, 신시기의 천극 작가 웨이밍룬은 <반금련> (1986)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전통을 계승하고 현대인의 관점에 걸맞게 창작하고 있는가.

천극 반금련은 두 줄기의 서사 맥락이 엇섞이며 진행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하나는 극중 인물로의 반금련이 장대호- 무대랑- 무송- 서문경으로 이어지는 네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점차 타락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 주요 맥락이 흘러가는 가운데 시대나 국기를 초월한 여러 남녀 인물들이 수시로 튀어나와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고 서로 논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구성은 마치 하나의 작품 속에 전통과 현대의 시각이 공존하는 모습을 띠게 하여 그야말로 한층 개방적인 연극적 사유로 현대적 의식을 전통 희곡에 끌어들여 참신한 형식과 강렬한 철학을 지니게 한다.

극외 인물로는 무측천과 같은 역사 속의 여걸로부터 수호전의 작가로서 전통적 남성을 대변하는 시내암, 여성의 입장을 다소 두둔하는 홍루몽의 남주인공 가보옥,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렸던 톨스토이(Tolstoy) 소설 속의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1980년대 리궈원의 화원가 5에 나오는 현대 여성 여사사까지 다채롭다. 특히나 여사사가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반금련에 관한 여러 논쟁을 이끌어내며 전체 극의 진행을 주도한다. 소설 속에선 기자 출신의 여주인공으로 개성 해방을 추구하는 여성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문화대혁명 기간 조반파로 몰린 까닭에 혁명이 끝난 뒤에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자신이 여전히 그 시대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였고, 결국 시장은 며느리인 여사사가 남편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가도록 허락한다는 줄거리다.

 

 

 

 

 

반금련과 무대, 무송 형제. 그리고 돈 많고 힘 센 매력남 서문경. 이들은 시내암의 <수호지>와 소소생의 <금병매>에 동시 출연한다. 시기별로 보면 진하, 설리, 남궁준광이 전성기를 누리던 원말명초에 쓰인 <수호지>에서 먼저 나왔고, 여기서 반금련과 서문경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거기다가 살을 붙여 명나라 때 쓴 작품이 <금병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잘 나가던 무인 무송이 하루는 업무 차 고향 도시에 들렀는데, 벌써 마흔다섯 살이 된 큰형 무대가 그 새 반금련이란 젊고 아름다운 여인한테 장가를 든 거다. 지금이야 마흔다섯이면 한창 때지만 송나라 시절에 45세면 이미 발기부전 증상이 상당히 진전된 할배였다. 물론 이도 거의 다 빠져버렸을 거다. 고우영의 만화 <수호지>를 봐도 무대를 앞니 두 개로 특징하지 않았는가 말이지. 그래 둘 사이에, 금련이 입장에서 보면 하늘을 봐야 별을 따거늘 도무지 하늘을 볼 기회가 없어 아이도 하나 만들어내지 못해 히스테리만 늘어나던 찰나,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은 무송이 눈앞에 있으니 온몸이 근질거리지 않을 수가 있었겠느냐 이거다. 사태가 이러니 우리의 영웅 무송이 또 어찌 형수를 꾸짖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어느덧 몇 날이 흘러 무송이 떠나고 이젠 생과부 신세를 한탄만 하던 금련 앞에 돈 많고, 힘 좋고, 덩치 크고, 활수한 서문경이 등장하니 이들의 로맨스(라고 해주자)는 필수 코스였던 것. 둘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는 떡장수 무대. 어느 날 무대는 독을 먹고 픽 쓰러지더니 그 길로 횡사를 하고, 형의 부고를 들은 무송이 다시 돌아와 사태를 파악해 서문경을 때려죽이고, 금련을 칼로 쪼개 죽이고 자신은 스스로 잡혀 귀양을 가던 중 어찌어찌 해서 양산박 도둑떼에 들게 된다. 이 내용을 알고 있어야 중국 전통 가극인 천극(川劇)과 월극(越劇), 80년대 디스코, 서양의 오페라 등이 마구 섞이고, 등장인물도 송나라 시절 무대, 무송, 반금련, 서문경, 80년대 중국 소설의 주인공인 여사사’, 배나온 대머리 브론스키 백작을 죽자고 사랑해 공작(duke) 남편과 새끼까지 버리고 집을 뛰쳐나온 안나 카레니나마저 등장하는 신 전통희곡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여사사가 사실상 희곡을 교통정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걸로 읽었는데, 반금련의 행위가 현대의 관점에서 정말로 죽을죄인지, 아니, 죄이기나 한 것인지 새로이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망라한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자소서를 읽고 자기 방식대로 노래하고 춤도 추고, 반금련의 행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근데 내 생각엔, 옛날 것은 옛날 것으로 그냥 좀 내버려두면 안 될까, 했다. 꼭 지금의 규범으로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하긴, 그건 극작가 마음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