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전하는 남희 〈장협장원〉은 이미 남희 〈장협장원〉 최초의 형태는 아니며, 개작을 거친 것이지만, 음악, 연출, 배우 운용 등의 면에서 여전히 초기 남희의 소박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양식적 특성을 잘지니고 있다· 53장으로 된 장편이며, 사천의 선비 장협이 장원급제한 후 곤궁할 때 도움을 준 아내 빈녀를 배반하고 죽이려고 하였다가, 곤욕을 치르고 다시 부부가 된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활하는 건실한 여성 빈녀와, 형편이 좋을 때는 명분을 중시하지만 궁할 때는 명분보다 실리를 찾는 선비인 장협, 그리고 장협의 모욕적인 처사에 분노하여 복수하고자 벼르는 혁왕 왕덕용의 갈등이 작품의 기본 구조를 형성한다. 당송 시기부터 선비들의 등용문으로 기능했던 과거시혐의 폐해와 당대 세도가와 신진 사대부 간의 정략결혼으로 권력의 장기화를 꾀하였던 당시의 풍조를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깔고 있는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는 비록 그러한 권력의 결탁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선비의 배신 모티브가 중심을 이룬다. 이렇게 상투적인 스토리의 길고 산만한 전통 극을 천박하지 않고 우아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난 연극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과연 기능할까? 그런데, 장리에는 이 작품을 약 2시간에 공연될 수 있는 간결하고도 잘 짜여 진 구조의 곤극 〈장협장원〉으로 환골탈태시켰다. 전통극의 프레임을 유지하면서, 극적 전개의 속도감이나 전달 화법은 상당히 현대적인, 아니 현대 무대에서 전통 화법의 적극적 활용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곤극 〈장협장원〉의 개작은 크게 다음의 몇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소박한 남희 음악 형식으로 되어있던 작품을 그 후 몇 세기를 통해 세련화 과정을 거친 곤극의 연창 방식과 악곡 형식을 사용하여 극의 음악적인 틀을 다듬어서, 음악적으로 들을 만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또 53단락으로 전개되던 산만한 나열적 서사 구조를 다층적으로 압축하여 매우 긴밀하게 재구성하였다. 빈녀가 거처하던 고묘의 신인 판관과 소귀가 고묘가 배경이 되는 장면에서만 잠깐 등장하여 익살스런 연기를 보여줄 뿐이던 남희 텍스트와는 달리, 이들의 비중을 크게 확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빈녀와 장협을 따라 다니며, 허구 내에 귀신들에 의한 또 한 층위의 허구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즉, 배반과 복수 등으로 얼룩진 인간세계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귀신의 세계가 시종 이중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귀신의 세계를 엮어가는 판관, 소귀의 신축성과 탄력성 무제약성 등은 많은 무대처리를 효과적으로 소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이어서 재미를 극대화하면서 시공에 있어 경제적인 처리를 가능케하였다. 판관과 소귀는 이 작품의 이중 구조를 이루면서 수시로 극중에 편입되어 극중 인물과 함께 교통하고 극중 인물로서 발화하거나, 극중 인물과 분리된 귀신의 세계에서 관객에게 발화하거나, 또는 완전히 해설자로서 관객과 직접 대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간자, 해설자의 설정은 이 작품에 수시로 관객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제를 마련해 놓은 셈이다.

작자가 구산서회(九山書會)에 소속한 한 재인(才人)이라고 한다. 여진이란 종족이 동북- 아시아에 있어 그때 까지 잘 나가던 거란족의 요나라를 한 방에 멸망시키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했다. 세력을 더욱 확장한 금은 남진을 계속해, 후에 위대한 장군이 될 젊은 악비(岳飛)가 의용군으로 출전하기도 했던 대 송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1126년에 개봉을 점령한다. 개봉은 송의 수도로 이 사건 이전을 북송이라 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명판관 포청천이 바로 북송시대 사람이다. 이후 심기일전한 송은 항주로 천도를 하니 이때를 후세 사람들은 남송시대라고 한다. 바로 이 남송 시대에 ‘구산서회’라는 문화단체가 있었단다. 여기에 재주 많은 사람이 한 명 있어 남희라는 일종의 연극에 쓰일 작품을 쓰고 제목을 <장협장원>이라 했단다. 한문,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이라 하여 중국 당대의 대표적 문학 장르를 이야기할 때, 이런 연희의 작품인 ‘곡’은 원대에 와서 발전해 이후 경극 형태로 꽃을 피웠다고 이해하고 있는 바, 이미 송 대에서 원곡의 뿌리는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을 터이다. 이 연극, 또는 연희 <장협장원>의 등장인물은 모두 열두 명. 이 열두 역할을 여섯 명이 맡는다. 모든 장면에서 쉬지 않고 등장하는 남녀 귀신 둘과 주인공 장협 역은 한 명이 한 역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는 반면 장면마다 잠깐 들락날락 하는 인물은 한 명의 배우가 둘, 셋, 네 등장인물을 도맡는다. 이는 전에 읽었던 원곡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기억한다. 이런 일인다역은 책 뒤편의 해설에 의하면, 1) 경제적으로 배역을 운용하고, 2) 관객들에게 분장 바꾸기의 현장을 공개함으로써 배우의 물화物化를 통한 상징적이고 회화적 연기로 중국 전통극 미학의 기초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3) 양식화된 단계로 들어서기 전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여기서 2) 와 3)은 시간이 흘러 후대의 연극평론가들이 생각해낸 문화적 해석 아닐까. 역시 주요 목적은 배우를 적게 씀으로 해서 경제적 운용이 가능했으며, 배우들도 이를 통해 자신의 연기력을 과시할 수 있다는 일타 쌍피의 효과를 사장과 직원 모두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장협장원>에서는 일인다역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 무대장치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제사를 올리려고 하는데 제사상이 없을 때, 늙은 배우가 젊은 배우에게 엎드리라고 해서 등판 위에다 음식을 차림으로 제사상이 되고, 문짝이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갑자기 문짝 (또는 대문)을 만들기 위해 귀신 역할의 두 배우를 똑바로 세워 한 명이 문 한 짝씩을 맡아 기어이 대문을 만들어낸다. 이런 장면은 물론 배우 또는 연출가의 행위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승인함으로써 가능하게 되겠지만 꽤 괜찮은 연출이고, 이런 것이 벌써 12세기 초에 가능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럼 ‘장협장원’이란 무엇일까. 장협은 사람 이름이다. 당연히 남자. 사대부 출신으로 저 남쪽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외진 오기산 부근에 있는 오래된 사당 근처에서 강도 둘을 만나 입고 있던 옷까지 홀랑 뺏기고 추운 겨울날 문짝 떨어진 사당인 고묘 안으로 숨어들며 극을 시작한다. 고묘 안에 들어 있던 두 남녀 정령 판관과 소귀. 판관은 진흙으로 빚은 (포청천일 거 같은) 인물상이고 소귀는 말 그대로 작은 여자 귀신. 이 귀신들은 고묘에 기어들어온 장협과의 관계를 심화시켜 나중엔 장협과 의사소통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예를 들어 장협이 판관과 소녀에게, 지금부터 문 역할 좀 해주시오, 라고 부탁하면 좀 투덜대다가 정말로 둘이 옆으로 서서 문, 한자 모습 그대로의 문門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장협이 거지꼴을 하고 고묘에 들어서고 조금 있으니 여자 주인공 빈녀, 말 그대로 고묘에서 홀로 사는 가난한 여자가 들어오고, 기타 동네 사람 몇 명도 도착해, 빈녀에게 냄새나는 옷도 빌고, 사람들한테 음식도 얻어먹은 끝에 빈녀와 혼인을 해 두 달 동안 부부의 관계로 지낸다. 그러다 시기가 가까이 와 장협은 서울로 가 과거시험에 응시해, 시험장에 앉아 과제가 나오자마자, 일필휘지로 선장하니 자자이 비점이요 구구이 관주라, 그냥 장원을 해버리는 거 아니냐. 송나라에서도 과거에서 장원을 하면 황제의 명에 의하여 구름 같은 말을 타고 도성을 한 바퀴 돌았으며 관직에 들 때까지 장원한 자에게 허락되는 특정한 집에 거처했던 모양이다. 그래 장협이 과거에 장원을 했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장협장원>으로 정한 것. 근데, 문제는 이제 장원 급제해 앞길이 훤하게 트인 상황인데 집도 절도 없고 가족도 없는 저 산골의 사당에서 혼자 사는 빈녀를 마누라로 발표하기엔 좀 그렇다는 어쩔 수 없는 사실. 그렇다. 중국에서도 있었고 유럽에서도 있었고, 무엇보다 한국에서도 있었다. 여자가 식모살이, 룸살롱 접대부 하면서 애인 공부시켜놨더니 남자가 떡하니 사법시험 통과해 판사가 된 후에 나 몰라라 하는 일. 그동안 애나 하나 만들지 않았으면 불행 중 다행이나 애라도 하나 있는데 또 그 아이가 어떻게나 귀엽게 생겼는지, 만일 이런 거 생기면 말 그대로 영화 제목 하나 나오는 거다. <미워도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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