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그 무엇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함께 살아갈 삶을 상상한다. 실제 체험하는 삶이라기보다는, 상상하는 삶을 말로 표현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언어로 표현 된 삶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 같은데, 언급된 대로 일어나거나 일어날 것이다. 등장인물이 전하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르느 리그르에게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모두 사실’이라고 대답한다. 작가는 우리 삶과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언어, 단어의 힘을 탐구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 아니 원하는 이미지로 고정시키며 영향을 미치는지 주목한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므로 시각화하거나 재현할 필요가 없고, 삶의 자취, 발자취를 더듬는 형태가 필요할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르느 리그르의 문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암시적이고 매혹적이며 불안을 조성한다. 한계상황에 맞서는 방식이 <나의 그 무엇도>에서는 화법으로 빈번하게 나타난다. 아픈 상처를 끌어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주인공 ‘나’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생각해, ‘나를 쳐다보지 마. 나는 생각해, ‘나는 너를 파괴해’. 그렇다고 난 달리 행동하지 않아. 그냥 앉아서 계속 애무해. 내 존재만으로 너를 아프게 한다고, 나와 있으면 네가 왜소해지거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네게 말할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있어,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나를, 늦기 전에 꺼져, 라고 말하는 나를,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 나는 침묵해. 너는 침묵해. 너는 눈을 감고 살짝 미소를 띠며 누워 있고, 우리에겐 함께 살 수 있는 새 아파트가 있어. (98쪽) - 스태판 브론슈베그(s. Braunschweig)

<나의 그 무엇도>는 <나는 사라진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익숙하지 않은 남녀가 애써 대화하며 관계를 이어가는 장면으로 <나는 사라진다>가 끝난다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칭작한 작품이 <나의 그 무엇도>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만남과 헤어짐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뜻밖의 재앙이 닥친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두 작품은 이런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스테판 브론스베그가 지적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포장된 나의 이미지와 진정한 나, 타인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어요. 너무 기진맥진해서.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동안 냉기를 쐬며 서있을 때도 있어요. 제가 쓰고 있는 가면을 얼굴에서 떼어낸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주위 사람들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다 보니 저 자신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조각조각 나는 것 같아요. (한 상대가 원하는 이미지로 가면을 쓰는 삶에 지쳐 상담을 받은 K의 고백이다. <나는 사라진다>에서 주인공은 남편의 실상을 짐작이나 했을까? ‘여자 친구’는 딸을 잃고 더 이상 ‘나’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나의 그 무엇도>에서 유령처럼 등장하는 과거의 인물들로 인해 ‘나’와 ‘그’는 얼마만큼 조각난 것일까? ‘그’는 ‘나’에게 어떤 가면으로 다가온 것일까? ‘나’는 이들에게 왜 가면을 벗지 못한 것일까?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질문이 샘솟는 심오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아느르 리그르
1968년 노르웨이 베르젠에서 태어난 아르느 리그르(ARNE LYGRE)는 문학도였다. 20대 중반부터 글쓰기를 시작한 아르느 리그르는 1998년 첫 희곡 [엄마와 나 그리고 남자들(MAMMA OG MEG OG MENN)]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소년의 그림자(SKYGGE AV EN GUTT)](2003), [목적 없는 남자(MANN UTEN HENSIKT)](2005), [지하에서 보낸 나날(DAGER UNDER)](2006), [그 이후의 침묵(S? STILLHET)](2008), [나의 그 무엇도(INGENTING AV MEG)](2013) 등 그의 희곡은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고 공연되었다. [나는 사라진다](2011)는 노르웨이 최고의 연극상인 입센희곡상을, [너를 내버려 둬(LA DEG VÆRE)](2016)는 최우수 무대 텍스트 헤다(HEDDA)상을 받는다. 아르느 리그르는 소설가로도 명성을 얻는다. 첫 단편 모음집 ≪시간 속에서(TID INNE)≫(2004)와 장편소설 ≪죽은 내 남자(MIN DØDE MANN)≫(2009)로 노르웨이 권위 있는 문학상(각각 BRAGEPRISEN과 MADS WIELS NYGAARDS' LEGACY)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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