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아르느 리그르 '나는 사라진다’

clint 2019. 9. 22. 10:28

 

 

 

나는 사라진다.’는 주변의 상황과 끔찍한 과거의 영향으로 연약해진 자아와 현대인의 불완전성을 그려낸 수작이다.

 

내 인생의 첫 기억은 죽음이다. 한 젊은 여자가 식당에서 자살한 장면은 나를 줄곧 따라다녔다. 이상한 것은 자살한 여자의 실루엣은 어렴풋한데 그 장면을 보고 놀란 내 모습은 또렷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아르느 리그르의 희곡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았다.

천재지변인지 전쟁인지 내란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소시민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서 나는 사라진다의 등장인물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제3자의 시선에서 자신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이들을 상상한다.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에 맞서는 상황, 가족을 버려야 살 수 있거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죽여야 하는 상황 등 주인공 와 주변 인물은 세상의 끝자락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들을 상상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자신들의 삶을 반추한다. 이탤릭체로 표기된 상상 속 인물들의 대화처럼 굵게 쓰인 지문도 주인공 를 객관화하는 방법이다. 도입부시작하다에서 예를 들어보자 

한동안 나는 말이 없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창가를 떠난다... (7)

 

 

 

 

주로 주인공 의 움직임, 동선, 태도,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굵은 글씨는 등장인물이 서술자가 되어 자신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다. 굵은 글씨로 본문과 구분해 놓지 않았다면 독백처럼 보이겠지만 내용은 지문에 가깝다. 그렇지만 일인칭 주어로 된 문장 구조 때문에 작가의 지시문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지문의 자리에 위치한 굵은 글씨는 라는 대상이 객관화되듯, 또는 제2의 자아가 설명하듯 를 묘사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다. 를 객관화하는 것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는 노력이자 상황에 전복되지 않으려는 차가운 몸부림이기도 하다. 내가 다섯 살 때 겪은 죽음에 대한 기억도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새마을운동 물결 속에서 도시로 상경한 어느 여자의 일생이 덧없이 사라진 순간을 감당하기 쉽지 않은 나이였다. 그래서 어쩌면 사건 현장을 사진 찍듯 떠올리며 거리 두기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사건을 목격한 내 모습을 정면으로 기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희곡은 일반적으로 등장인물의 대사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직접화법을 빈번하게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 라고 나는 말해”, “... 라고 나는 생각해갚은 표현은 <나는 사라진다>의 지문과 마찬가지로 거리 루기 효괴를 낸다. 제삼자의 시선에서 자신의 심연을 살펴보듯, 등장인물은 말과 침묵, 현실과 상상 사이의 거리를 날카롭게 인식한다. 아니 적어도 독자로 하여금 그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가 함께할 새 아파트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몇 점 안 되는 가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느르 리그르

1968년 노르웨이 베르젠에서 태어난 아르느 리그르(ARNE LYGRE)는 문학도였다. 20대 중반부터 글쓰기를 시작한 아르느 리그르는 1998년 첫 희곡 [엄마와 나 그리고 남자들(MAMMA OG MEG OG MENN)]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소년의 그림자(SKYGGE AV EN GUTT)](2003), [목적 없는 남자(MANN UTEN HENSIKT)](2005), [지하에서 보낸 나날(DAGER UNDER)](2006), [그 이후의 침묵(S? STILLHET)](2008), [나의 그 무엇도(INGENTING AV MEG)](2013) 등 그의 희곡은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고 공연되었다. [나는 사라진다](2011)는 노르웨이 최고의 연극상인 입센희곡상을, [너를 내버려 둬(LA DEG VÆRE)](2016)는 최우수 무대 텍스트 헤다(HEDDA)상을 받는다. 아르느 리그르는 소설가로도 명성을 얻는다. 첫 단편 모음집 시간 속에서(TID INNE)(2004)와 장편소설 죽은 내 남자(MIN DØDE MANN)(2009)로 노르웨이 권위 있는 문학상(각각 BRAGEPRISENMADS WIELS NYGAARDS' LEGACY)을 수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