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유령 트리오 (Ghost Trio)는 그의 텔레비전 극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이다. 여성 보이스 오버와 말하지 않는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 텔레비전 극 ‘에이 조 (Eh Joe)’와 유사하지만, 목소리와 인물의 관계 및 극이 전개되는 방식 등에는 차이가 있다. 유령 트리오의 경우 목소리와 인물의 관계는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조의 기억 속으로 침범하는 에이 조보다 유동적이며, 클로즈업을 사용하는 카메라의 테크닉 측면에서도 내면으로 침투하는 효과를 위해 사용된 에이 조의 긴 클로즈업과 달리, 입체 대상을 평면 사각형으로 연속 클로즈업함으로써 추상화를 시도하고 있다.
첫째, 압축된 반복으로 이루어진 형식은 유령 트리오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형식이다. 유령 트리오 는 형식적 측면에서 볼 때 에이 조 에비해 보다 더 단순화되고, 추상화된 작품이다. 곤타르스키(S. E. Gontarski)가 유령 트리오의 형식적 변화에 주목하여 유령 트리오를 기점으로 “형식적 최소화”가 가속화된다고 한 것은 이런 형식적 차이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둘째, 소리와 시각 이미지를 대비시킴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후기극의 방향은 유령 트리오로 이어진다. 간결한 형식 속에 시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베케트의 후기극은 언어에 의한 재현 불가능성이 낳은 결과물이다. 베케트의 전 저작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베케트에게 시각 이미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언어로부터 탈출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언어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다. 언어와 재현 불가능성으로 씨름하는 베케트의 글쓰기는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에서나 그의 마지막 극 밤과 꿈(Nacht und Träume) 에서나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난 아니야 에서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많은 말을 하거나, 또는 밤과 꿈 에서처럼 언어를 완전히 배제하거나 간에, 그것은 모두 재현 불가능한 언어에 대한 베케트의 저항적 표현 방식이다.

후기 극에서 형식이 압축되면서 비언어적 요소와 이미지가 부각되는 특징은 유령 트리오를 비롯한 1970에서 1980년도 사이의 텔레비전 극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의 추상화, 침묵하는 인물, 시각 이미지에 집중하는 문제와 결부된 것이다. 베케트의 글쓰기에서 불일치, 분열, 단절의 언어가 침묵을 포용하는 과정은 압축된 형식과 시각 이미지로 표현되는 후기극의 실험 과정과 일치한다. 에슬린(Martin Esslin)은 마지막에서 목소리가 침묵하는 반면 이미지만으로 구성된다고 하여 유령 트리오를 “말에 대한 이미지의 우위”를 보여주는 극이라고 가한 바 있지만, 이는 베케트의 글쓰기의 본질을 간과한 말이다. 베케트의 극에서 이미지가 지배적이라 하여 그것이 말에 대한 이미지의 우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유령 트리오가 언어의 침묵으로 향하지만, 이것은 “말에 대한 이미지의 우위”가 아니라 말에서 이미지로 이동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극은 언어의 실패로부터 시각 이미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베케트 극의 전환점이 된다고 하겠다. 언어에서 이미지로 이동하는 과정은 고정된 하나의 시점을 해체하는 반복 전략과 병행된다. 이 극은 프리액션(Pre-action), 액션(Action), 리액션(Re-action)으로 된 반복적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프리액션은 V의 주도하에 카메라가 함께 공모하여 보기를 주도해가는 부분이고, 액션은 V의 언어 및 시각능력에 대한 확신이 의문으로 바뀌는 부분이며, 마지막 리액션은 V가 침묵하는 가운데 반복되는 액션이다. 이와 같은 유령 트리오 의 반복적 형식은 소리에서 시각 이미지로의 이동과 일치하며, 확립된 시점을 계속해서 해체해 나가는 과정과도 병행되어 있다. 시점의 해체는 다시 보기라는 유령 트리오 의 기획 뿐 아니라, 소리에서 이미지로의 이동과도 맞물려 있다. V가 사라진 뒤 반복되는 리액션은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액션이다. 물론 리액션에도 음악과 창밖의 빗소리, 그리고 노크소리및 발소리 등의 청각적 요소가 남아 있지만, 이런 소리들은 시각을 통제했던 V의 언어의 기능과 달리 이미지와 어울려 부재자의 가능성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초상이 제거되었던 것처럼, 에이 조의 목소리가 하나님을 조롱한 것처럼, 유령 트리오에서 V의 목소리는 리액션이 시작되기 직전에 사라진다. V가 사라진 리액션의 스크린은 베토벤의 ‘유령 트리오’를 배경으로 F의 움직임과 이미지로 채워지기 때문에, 리액션에서 음악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베토벤의 ‘유령 트리오’는 프리액션이나 액션에서부터 들었던 음악이지만, 이 시점에 다시 듣게 되는 ‘유령 트리오’는 유령 트리오의 한 샷을 잇는 다음 샷인 리버스 샷은 이전 샷에서 보여진 것을 보는 시각 주체(인물)를 제시함으로써 시각적 연속성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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