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이 오르면 주인공 주윤발 기자의 진술로 극이 진행된다. 물론 관객은 공연의 마지막에야 진술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사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는 퓰리처상을 꿈꾸는 기자 초년생. 하지만 사회와 신문사는 그에게 그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기사를 요구한다. 정치가의 썩은 정신을 고발하려는 그의 의지는 신문사의 데스크에 의해 무참하게 묵살되고 그는 퇴사를 강요당한다. 의지가 말살되는 과정에서 그는 소통과 불통이라는 개인적, 사회적 구조 속에서 심한 변비를 앓게 된다. 변비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개의 입, 윗입과 아랫입의 소통 부재라는 작가의 추상적 상상이 작품 속에서 번뜩인다. 다른 신문사로 옮긴 그는 기자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특종을 취재하게 된다. 취재 도중 찍은 사진의 한 부분, 희미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부분을 기자의 직감으로 파헤쳐 확대해보니 의외의 단서를 발견한 것이다. 단서는 다름 아닌 패스트푸드 포장지. 정치적 테러에 대한 항거로 단식투쟁 중인 야당의 거물 6선의원의 기자회견을 취재하던 도중 의원의 침대 밑에 숨겨진 햄버거 포장지를 발견하고는 신문에 대서특필을 하게 된다. 하지만 특종은 잠시, 가판대에 깔렸던 신문은 야당에 의해 완벽하게 수거되고 부장은 그에게 돈봉투를 주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부정한 거래를 거절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개밥의 도토리 자리. 작가는 제도권에서의 반발은 곧 직장에서의 퇴출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켜 놓았다. 자신의 의지를 펼치고자 인터넷을 통해 고발하자 양심적 기자라는 칭호와 함께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며 급기야 주윤발은 인터넷 신문사의 사장이 된다. 또 다른 음모와 편법, 그가 혼심의 노력으로 발견한 사진이 합성이라는 모략에 의해 그의 꿈은 산산이 무너지고 진실의 왜곡은 젊은 기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한 해를 마감하는 연말, 캐럴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는 방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떨고 있다. 직장의 파산, 애인과의 이별, 그나마 삶의 터전이었던 원 룸은 밀린 방값으로 출입이 막히고 전기, 수도, 먹을거리가 차례로 단절된다. 주윤발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자조적인 대사를 읊조린다. “캐럴송이 이렇게 슬픈지 몰랐어...,” 마지막 남은 라면을 부셔먹으며 그는 자신의 의지-사회를 밝히려는-를 사회에 알리고자 최선의 선택을 한다. 다름 아닌 방화, 건물에 불을 질러 사회를 밝혀보겠다는 몸부림으로 공연은 막을 내린다.


작가의 글
이 작품은 본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극단 〈김태수 레파토리〉의 역사적인(?) 창단 공연작이다 역사적이라고 한 건 내 개인의 깜냥에 비추어 그렇다는 것이지 그 자체가 한국연극에 획을 긋는 식의 역사적사건은 물론 아니다. 십 수 년 동안 타인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써왔었던 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 극단을 위해, 평소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작품이기에 애정은 넘치고 의미는 남다르다. 포스터에 굵은 글씨로 새겨진 메인 카피를 보면 이러하다
‘탱고의 화려한 몸짓 뒤에 감춰진 우리들의 초라한 일상, 그 한없는 부끄러움’
이 작품은 소통에 관한 주인공의 통렬한 고백 시이다. 만성변비에 시달리고 있는 주인공은 오늘도 배설에 실패한다. 벌써 한 달째 게다가 언제부턴가 욕실의 하수구까지 막혀 물의 순환은 막히고 그 안에서 생활하기 힘든 곤란한 처지에 처한다. 수리공을 불러도 전화선 접촉이 나빠 매번 대화는 엇갈리고 치질 치료 차 찾아갔던 대장항문과의 간호사 단비와 만나 사랑에 빠진 후로 최근 그녀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 먹는 입과 배설하는 입, 혹은 윗입과 아랫입으로 대변되는 두 구멍 사이의 소통부재로 모든 것이 원활하게 가동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주인공의 우직한 자의식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를 흥미로운 시츄에이션과 극적 유머, 감성적 언어로 스피디하게 그린 블랙코미디로서, 정의의 개념이 혼돈스럽게 변질되는 현 사회에 대한 비판과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한 마디로 소통을 씨줄로, 정의를 날줄로 하여 현대의 복합적인 문제를 유기적 조직으로 엮어나가 하나의 주제로 통일하는 형식으로 풀어낸 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탱고는 커뮤니케이션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소통이라는 알레고리를 함축한 채 매우 중요한 극적 메타포로 유연히 작동되고 있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주제의식이 선명했으며 다채로운 플롯을 펼쳐 작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힘 있게 연극을 이끌었다는 후한 세간의 평을 얻었다. 개인이 갖는 미시적 관점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사회와 생을 바라본, 나름의 의미를 지닌 작품을 본인 이름 극단에 첫 공연으로 올리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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