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세한 '침대 밑에 아버지'

clint 2019. 5. 8. 12:02

 

 

 

우리 아버지가 침대 밑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아버지는 왜 침대 밑에 있는가. 그가 침대 밑에서 듣고 싶던, 혹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

 

한 가족의 가장인 태성은 오늘 명예퇴직을 당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살아오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후회감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의미 있는 일을 만들기 위해, 신혼 초를 제외하고선 챙겨준 적 없었던 결혼기념일을 챙겨주기로 결정한다. 아내에게 선물할 꽃다발까지 사 온 태성은 더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침대 밑으로 숨는다. 예상치 못한 사건은 더 인상 깊은 순간으로 남는 법이라며 침대 밑에서 아내를 기다리던 태성은 곧 침대 밑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기다렸던 아내가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과 동침하는 사건을.

그 장면을 목격하면서 태성은 문득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코끼리를 봤던 기억, 자신의 부모님이 겪었던 상처, 자신의 아내에게 청혼했던 기억,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한 여자에게 주었던 상처. 아내가 자신에게 준 상처를 직시하는 순간, 시간 속에 파묻혀서 떠올리지도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된다. 모두 다른 사람과 다른 시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사건들 속에 숨어있는 상처들의 유형은 모두 엇비슷하다. 침대 밑에서 남자가 숨어있었던 것은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낸다.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지만, 그 과정은 꽤나 해학적으로 묘사되기에 심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태성이 침대 밑에서 나오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상처 입었다고 여겼던 사건이, 사실은 자기가 아내를 상처 입혔던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극 중 앞에서 연출되었던 가벼운 분위기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연쇄의 과정은 마치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어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연쇄는 태성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말로 인해 비로소 끊어지게 된다. 아니, 어쩌면 또 다른 상처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태성이 과거에 상처를 주었던 여자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태성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말이다.

 

아이는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상처를 주는 데에는 무심하고 상처를 받는 데에는 예민하다. 그 순간에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무할 수 있을지라도, 상처는 어느 순간 떠올라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웃음 속에서 전해지는 내용은 꽤나 씁쓸하다. 관객은 곧 스스로 생각하게 되리라. 그렇다면 이 잔인한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나가던 중 동행인에게 감상을 물어보았다. 동행인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 그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관객 각자가 안고 나가는 해결책은 모두 각기 다를 것이다.

 

** 엔딩은 5개의 버전으로 되어 있다. 공연을 한다면 그중 하나를 골라서 해도 크게 의미가 바뀌지는 않을 듯하다.

 

 

 

 

김세한은 1989년에 성남에서 태어났다. 2013년 벽산희곡상에 [백돌비가-미망이 된 여인의 사초]가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군대에서 쓴 희곡으로 세상에 소개된 그는 각색, 창작을 가리지 않고 열렬히 작업 중이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작가는 무대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특유의 재기발랄함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조금 다른 세상을 희곡에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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