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포는 조선시대부터의 집산지였으며, 그로 인해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의 집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8.15 해방이 머지않은 어느 날, 노년의 일락은 언제나 마포나루에 나와 있다. 오매불망 그가 기다리는 것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도화와 경동. 해방 전에는 중국과 만주에서도 마포나루를 찾아오는 배들이 많아 행여 독립군이 된 아들이 밀입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황소바람을 기다린다.”는 그를 미친 노인 취급하기 일쑤다. 모두 그가 젊은 시절에 저지른 과오에서 비롯된 일인데 ..
1896년,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이 끝나면서 방곡령까지 실패로 끝난 조선의 정세는 일본으로의 쌀 유출이 심해지자 농민들이 동학을 업고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지만 일락은 마포의 한량으로 통하는 파락호 생활을 포기할 줄 모른다. 광흥창과 소금창고, 새우젓 도가가 있는 마포나루는 한강변에서 가장 큰 포구였고 이곳을 통해 세곡미는 물론 어물과 소금 등 팔도의 산물이 다 출입했다. 그곳 광흥창사인 아비의 권력을 믿고 한양과 마포를 오가며 갖은 망나니짓을 다하던 일락은 어느 보름날 밤, 술에 취해 복사 골을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마주친 도화를 보고 한눈에 반하나, 이미 일락의 집 머슴 영근과 정혼한 사이인 도화는 그의 사랑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집 머슴의 여자에게 거부당한 앙심으로 영근에게 도둑 누명을 씌우고 결국 도화는 영근을 구하기 위해 일락의 수청을 들게 되고, 가까스로 옥에서 풀려난 영근은 도화에게 같이 떠나자고 하나 이미 더럽혀진 몸인데다, 일락의 아이까지 가진 도화는 그의 청을 거절하고 밤섬으로 들어간다. 그 충격으로 일락의 집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영근.

그로부터 10년 후, 당시 가까스로 화마에서 벗어난 일락은 가진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매화에게 맡긴 마포객점으로 돌아오지만 친일 순사가 된 향만으로부터 밤섬에 원수 최영근의 아들을 낳은 도화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길로 밤섬으로 달려가는 일락. 뽕밭에 있는 도화모자에게 온갖 패악을 다 부리고 돌아오는 그지만 자꾸만 아이가 눈에 밟히고 애잔한 도화의 잔상이 가슴을 후벼 판다. 결국 자신이 너무했다 싶어 모자의 노리개를 사서 밤섬으로 갈 계획인 일락. 그러나 일락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영근이 선수를 쳐 도화를 데리고 밤섬을 떠나고, 오로지 경동부자를 위한 그녀의 희생을 알 리 없는 일락은 그들이 버리고 떠난 경동을 원수의 아들이라 여겨 모질게 대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10년 후, 스무 살이 된 경동은 여전히 일락의 구박을 받으며 마포객점 일꾼으로 살아가지만 일락을 원망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다시 찾아와 팽이 치는 법을 가르쳐준 유년의 기억과, 5년 전 일어난 배다리 폭동의 와중 다리를 다친 후에는 그나마 장작 패는 일 정도로 그쳐, 보기보다 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앵두에게 치근거리는 향만을 통해 일락과 영근 사이의 악언을 전해들은 경동은 우발적으로 그를 때려죽인 후, 단지 원수의 아들에 대한 복수심에서 자길 거둬준 거냐는 등 일락을 원망하며 앵두와 함께 마포를 떠나는데....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경동이 친 아들이며 도화가 그리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매화를 통해 알게 된 일락은 젓갈 장사를 하며 경동과 앵두를 찾아 팔도를 헤매지만 결국 그가 찾아낸 것은 돌림병으로 어린 자식을 잃은 경동이 마지막 자식을 낳다 난산으로 숨진 앵두를 묻고 만주로 떠났다는 사실과, 동네아낙이 거둔 손녀뿐이다. 허탈함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일락. 그 순간 잘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는 아기가 그를 보고 까르르 웃는다. 본능적으로 핏줄을 알아보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 그 웃음이야말로 황소바람을 막아 줄 풀 잘 먹인 창호지와 같은 바람막이로, 일락이 그 바람막이에 의지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동안, 경동은 천신만고 끝에 만주로 넘어와 영근에게 생부가 누구냐고 따지는데, 자신의 품에서 병사할 때까지 아들을 잊지 못한 도화를 통해 감화를 받은 영근은 ‘너의 아비는 조선’이라 말하며 원수의 아들을 독립군으로 거듭나게 한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마포 나루터에서 황소바람을 맞는 일락. 바람이 분다.. 황소바람이 도화와 경동의 흔적 같기도 한 낯익은 그 바람이... 뿌옇게 흐려진 일락의 눈에 저만치 그리운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감격에 벅찬 일락이 손을 내미는 순간 행복한 미소가 머무는 그의 귓전에 8.15 해방을 맞은 조선백성들의 함성이 우레처럼 밀려든다.

작가의 글
좁은 틈으로 세게 불어드는 바람인 “황소바람" 바늘구멍으로도 들어오는 이 막강한 바람처럼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도 누구나 불가항력적인 숙명의 바람을 맞기 마련이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연정에서 비롯된, 탐욕에서 비롯된, 허황된 꿈에서 비롯된 갖은 유혹의 충동.. 조선후기 마포나루에 자리한 광흥창 관리의 아들인 일락이 복사꽃 휘날리는 복사골에서 도화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연정’ 이라는 “황소바람" 신분의 격차도, 부귀영화도 결코 바람막이가 될 수 없었던 그 광포한 바람에 휩싸여 애증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이들의 삶을 통해 참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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