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보>는 예쁘고 지적이며 교양을 갖춘 공주형의 여자이다. 반면 보보의 파트너 <자자>는 머리가 나쁘고, 불학무식하기 짝이 없다. 다만 원초적인 힘, 즉 원초적인 폭력성을 소유한 인물이다. 둘의 관계는 파트너라 하지만 몸종과 주인으로써 주종관계에 가깝다. 당연히 아리따운 여인 <보보>가 주인이다. 둘은 환상적인 콤비처럼 보이지만 자자의 내재된 폭력성 때문에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그들 앞에 <둘시>라는 못 생기고 천한 신분의 여인이 끼어든다. (둘시는 원래 돈키호테가 눈이 삐어 사랑했던 하녀 신분의 여자이다)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자자는 둘시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보보의 입장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성적 파트너인 자자를 빼앗길 수 있겠는가. 해서 질투심이 타오른다. 그리고 드디어 햄릿을 닮은 왕자가 나타난다. 왕자는 형을 살해하고 곧장 달려오는 길이다. 왕자는 한 눈에 반해 보보에게 결혼을 요청한다. 이번엔 자자의 질투심이 타오른다. 왕자에게 보보를 내줄 수 없다. 더구나 그는 머리 없는 폭력, 즉 무력을 상징한다. 이 게임에서 권력을 잡는 인물은 당연히 보보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자를 끝까지 자기 옆에 두고 싶어 한다. 머리 없는 폭력을.

이 작품 힘과 권력에 의해 형성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동화적 캐릭터와 희극적 상황으로 알레고리 화하여 신랄하게 풍자한다. 특히 권력으로 상징되는 [보보]와 폭력으로 상징되는 [자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불합리와 억압 속에서 과연 폭력이 어떻게 권력에 복종하며 또한 권력과 폭력이 유착하여 만들어 내는 사회의 구조가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유희적 놀이에 빗대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비극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불합리한 권력과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묻고 있다. 폭력에 의해 잉태되고 형성된 사회. 그 사회의 구성원인 나는 과연 무엇인가....

작가의 글
동화적(童話的) 세계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어떤 생명력 혹은 힘을 갖는가. 동화란 슬픔에 찌든 수많은 서민들에게 잠시 시름을 잊게 해주는 환상놀음인가. 아니면 그 시대에 숨겨진 진실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가. 어쩌면 동화는 양쪽의 속성을 교묘하게 다 담고 있는 듯 하며, 양쪽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그럼 우화(寓話)와 다른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화는 좀 더 냉소적이며 현실적인 문제에 가까이 접근해 있고 어둡기까지 하다. 사실 우리 연극계는 우화의 수법을 즐겨 다뤘다. 그런데 시대는 바뀌어 관객들은 담론(談論), 혹은 논쟁적 연극에 식상하기 시작했다. 담론의 시대는 갔다고 떠든다. 과연 그럴까? 담론적 본질을 빼버리고 무슨 놈의 예술을 논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렇다면 우린 좀 더 진화된 방법으로 관객에게 다가가야 한다. 담론적 태도를 깊숙이 감추고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프로그램화하기>가 바로 이 작품의 의도이다. 프로그램화하기란 <포장을 달리하기>와 엄연히 다른 의미이며, 내용은 <성과 권력>의 속성, 혹은 역학관계를 담아보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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