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차근호 '사랑의 기원'

clint 2019. 3. 22. 12:50

 

움직일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심지어는 눈동자조차 움직일 수 없는 의 공간에 서로를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를 볼 수 없으며 단지 목소리를 통해 서로를 알아보고, 오로지 대화로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남자는 영원히 정면만을 응시한 채 서로의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여자는 남자의 한탄을 위로하며 지금의 사랑에 만족하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그 무엇도 남자의 열정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남자의 염원 때문일까? 어느 순간, 남자는 그토록 갈구하던 자신의 연인을 의 공간으로 데리고 가게 된다. 그리고 남과 여는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나란히 서있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체온이 느껴지는 서로의 손을 잡고 이 시간이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남자도 여자도 비로소 사랑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남자는 다시금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단순히 연인의 손만을 잡은 채 멍하니 정면만을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가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그들에게는 믿겨지지 않는 현실에 말을 잃을 뿐이다. 꿈에서나 상상을 했던 연인의 얼굴을 마침내 마주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떨리는 손길로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며 서로의 몸을 쓰다듬는다. 그들은 서로 육체에 탐닉하며 이제야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보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토록 만나길 고대하고 꿈꾸었던 남과 여는 어느 순간 지독한 건망증에 빠지기 시작하는데...  

 

 

 

 

2000년에 초연을 했던 이 작품은, 몇 차례에 걸쳐 수정되다가 2003년과 2005년에도 계속 보완작업이 이루어질 정도로 차근호에게 있어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며 작가가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작품이기도하다.

작품에는 오로지 남자와 여자 둘 만이 존재한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남녀 두 사람이 점을 이루며 각자 따로 존재하다가 만나 선을 이루고, 한 공간 안에서 함께 하다가 결국 서로를 잃어버리는 이야기이다. 만남과 사랑, 오해와 이별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상대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이기심과 사랑의 아픈 종말을 심도 있게, 그리고 매우 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점으로 존재할 때는 자신을 잃지 않았음으로 인해 상대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이 되어 서로에게 달려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을 잃어가고, 자신을 잃음으로써 상대에게 가는 길을 잃어버린다. 상대에게 가는 길을 잃었기에 자신의 공간에 상대를 가두려 하지만 이미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자신의 공간이라는 자체가 모순을 부여하는 왜곡된 차원이다.

 

 

 

     작가     차근호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영원히 평행을 달릴 수밖에 없으며 상대와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믿는 작가의 내면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바흐친의 말처럼 진실은 내게도 남에게도 존재하지 않으며 나와 남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진실이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관계 안의 진실은, 타협되고 협상된 사실의 누적물이 아닌 진실일 수 있는 것인가? 관계와 존재 사이의 갈등에서 출발하는 꿈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관계의 이상은 현실을 좀먹는 벌레가 되어 돌아온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고민하는 작가 치근호의 모순이 촉발되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차근호의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