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차근호 '하우스'

clint 2019. 3. 22. 09:14

 

 

 

부재(不在)란, 일차적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말 그대로 무엇이 존재하지 않음 또는 결핍을 뜻한다. 하지만, 때때로 부재는 자신의 존재(?)를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즉, 자신의(부재) 상태를 주위 존재들에게 끊임없이 인식시키는 방법으로, 존재하는 존재들보다 더 큰 존재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존재들은 이(추상적 또는 현실적) 부재가 부재 한다는 것 때문에 그 부재의 존재를 간과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가 바로 그러한 부재의 존재이다.
“하우스(The house)”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러한 한 가지 이상의 부재 속에 살고 있으며, 그 부재의 존재에 의해 삶을 지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부재가 등장인물 각자의 의도적 또는 아 직 알려지지 않은 비밀과 맞물려서 “하우스”라는 연극을 탄생시킨다. 하우스의 첫 장면은 관객을 묘하게 헷갈리게 만들면서 출발한다. 마치 동성애 부부를 연상케 하는 두 남자, 선우와 석재는 딸 유란의 약혼자라고 주장하는 낯선 남자 장 띠에르를 맞이하게 된다. 과연 이들 중 누가 유란의 아버지인가? 유란은 어디 있으며 유란의 엄마는 또 어디에 있는가? 석재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여학생과 그 여학생의 애인이라고 밝힌 남학생은 과연 그들 스스로가 밝힌 그대로의 상황과 인물이 맞는가?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를 꺼려하고, 이중의 이름과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을 시작한다. 그러나 석재와 선우가 애써 감추려고 했던 비밀은 이미 유란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석재와 선우가 죽여 파묻으려 했던 진실은 결코 죽지도 않고 파묻히지도 않는다. 죽였다고 생각했던 남학생이 벌떡 일어나 무대 위로 재등장하고. 불탄 나무가 여전히 베이지 않고 마당에 자리한 채 과거를 증거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진실을 죽여 묻어버리기엔 너무나 심약한 심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메타포다. 그들이 바로 그 심약한 심장 때문에 친구를 배반했다는 것이 이 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원천이기에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삶의 작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친구를 팔았으며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진실을 외면한 채 을 지켜가려 한다.

 

 

 

 

 

 

그러나 한 번 불탔던 은 결코 원상으로 돌이올 수 없고, 석재는 집을 팔아버리고 도망칠 날만을 꿈꾸며, 미자는 집을 떠나 요양원에 가있고, 유란은 외국에서 마약에 취해 지낸다. 뿔뿔이 흩어진 그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유란에 대한 장 띠에르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그들이 외면해온 진실이 을 무너뜨린다. 결국 은 어린 사기꾼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들의 진정한 ,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것만 같았던 과거의 잘못을 털어놓고 집을 포기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진실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던 압박감은 실상 진실을 파묻으려 덮은 거짓과 위선의 무게로 인한 것이었으며 진부한 감정이지만 그저 사랑했다는 사실들이 그들을 새로운 기족으로 묶어 그들만의 새집을 찾아 떠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버려졌던 조국에서 새로운 이름을 찾은 장 띠에르는 과연 사랑했던 유란에게 자신의 새 이름을 말해줄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작가는 그저 가능성만으로 무대를 마무리한다. 세상은 꿈을 꾸는 약한 심장을 가진 이들에게 너무나 가혹하고, 사기와 거짓으로 점철된 자들에겐 너무나 관대해 보인다. 그러나 진실을 묻어버리지 못하는 익한 심장이 꿈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집을 선사하듯, 장 띠에르를 꿈꾸게 하는 그의 여린 심장이, 그가 사랑을 계속할 수 있게 하리라는 것을 관객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50대 중반의 석재는 친구 선우와 함께 살고 있다. 석재는 아내 미자와 딸 유란을 두었지만 두 사람은 집에 없다. 유란은 프랑스에서 10년째 유학중이고, 미자는 유란이 유학을 떠난 뒤 10년간 정신병원에 입원중이다. 어느 날 프랑스에서 온 유란의 약혼자 지석이 석재의 집을 찾아온다. 지석은 유란이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석재와 선우가 누렸던 10년간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미자를 정신병원에서 데려오는 등 소동을 피운다. 이를 계기로 가정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난다. 30년전 운동권 학생이었던 석재와 선우는 친구를 배신해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원죄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죄책감으로 친구의 애인이었던 미자를 보살폈으며, 유란은 죽은 친구의 딸이었던 것.

석재와 선우는 과거에 붙잡혀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연극 전체가 과거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마약중독이 된 유란, 석재의 원조교제, 임신한 여자 친구를 빌미로 석재에게 돈을 뜯어내는 고교생 등 현재의 아픔을 대변하는 장치도 등장한다.

 

 

 

 

우선 이 연극의 두 축인 석재와 선우, 그들의 지난 25년간의 삶은 은석 - 그들이 배신했기 때문에 지금은 죽고 없는 그들의 친구의 부재에 의해 지배당해왔다. 은석을 배반했고 그래서 그가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둘은 석재가 은석의 여자 미자와 결혼하고 은석의 애를 키울 것을 결정한다. 하지만 죄를 갚기 위한 그 결혼의 결과 석재는 잠자리에서 미자를 안는 것이 불가능했고, 결국 정상적인 부부로서의 생활은 포기한 채 - 또 다른 부재 - 살아야 했다. 선우 또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감옥 같은 골방에 습지식물처럼 틀어박혀 살아왔다. 다시 말하면, 지난 25년간 석재와 선우는 의미를 잃어버린 가정의 틀 안에서 정신적 그리고 감정적인 공황상태로 살아온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즐겨 말하는 "행복한 집""행복한 시절"은 엄격한 의미로 따지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이다.

비밀을 지키고 죄를 씻으려는 선우와 석재의 노력은, 그래서 그들의 배반으로 만들어진 가정을 "행복한 집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미자와 유란이 각각 비밀을 알게 됨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러한 엄청난 비밀의 발견에 대해, 미자는 집에 불을 지르고 정신을 놓는 것으로, 유란은 외국으로 떠나 약물중독 등 자기 파괴적인 길을 걷는 것으로 각각 대응한다. 다시 말하면, 방법은 다르지만, 둘 다 현재라는 시간에서 도피하여 현재를 부재로 만듦으로써 과거의 비밀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결과 미자는 지난 10년간을 정신병원에서 보냄으로써 외국에 있었던 유란과 같이 선우와 석재가 사는 (가정이 아닌) 집에서는 부재의 존재였다. 현재의 시간이 부재인 미자나 그 시간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는 유란과는 달리, 유란의 약혼자며 해외 입양아인 지석은 자신을 지배해온 출생에 대한 의문, 즉 과거의 부재를 풀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하지만, 과거와의 만남은 지석이 그간 꿈꿔왔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그 결과 과거에 대한 의문은 해결이 됐으나 그것이 모성의 부재로 다시 부각되는 것을 지켜보며, "하우스"의 등장인물들이 찾는 구원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석재의 원조교제를 통한 일탈, 선우의 작위적이고 자폐적인 (집에서의) 감옥생활, 미자의 무의식 속으로의 숨바꼭질, 유란의 약물중독 등등, 그들 모두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은 피하고 그 외의 방편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찾으려는 절망적인 몸짓을 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무대 위에서 극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은 '지금'이라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각자의 과거와 과거의 비밀, 과거의 부재, 현재의 부재, 오지 않을 미래 등이 뒤섞여있는 다층적 시간이다. 이 시간의 다층성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각자 타인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예로 미래지향적인 지석과 과거지향적인 유란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긴 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바라보며 다른 시간에서 구원을 찾는 이유로 자신의 상처를 서로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선우와 석재에게도 현재라는 시간은 미래로의 일탈적 탈출을 꿈꾸는 석재와 과거에 의해 지배받는 현재에 머물려는 선우의 욕망 사이에서의 갈등적인 시간일 뿐, 두 사람 묶어주던 공범자적 연대감은 이미 대부분 상실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우스"에 현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 현재라는 시간을 2003년에 대한민국이 가지는 역사성(historicity) 안에서 풀어가고 있다. , 교육의 틀을 벗어난 10의 모습, 원조교제, 파괴되고 굴절된 부부관계, 돌아온 입양아 등으로 대별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부재,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과 언어의 부재, 그리고 혁명과 에 대한 필연성의 부재가 그것을 모른 척 간과하고 사는 현재의 우리 모두를 선우와 석재 같은 공범자로 만들고 있는 것 "이다. 하지만 "하우스" 를 이러한 부재에 대한 끝이 없어보이는 절망에 관한 연극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연극의 마지막에, 과거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한국인으로서의 이름과 정체성을 회복하기 시작한 지석을 등장시킴으로써, "하우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족은 지켜야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 안에 희망이 存在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