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혜영에게 늙은 여인이 미제 화장품을 팔러 찾아온다. 여인은 혜영에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되는 순간이 없냐고 묻는다. 성실한 남편과 건강한 아이들, 그리고 넉넉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혜영에겐 아쉬울 것이 없다. 여인은 혜영에게 내기를 제의한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다시 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그렇게 해주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다시 후회를 하게 된다면 거슬러 간 시간의 두 배만큼 바로 늙어버릴 것이다. 혜영은 꿈인가 하고 그냥 웃어 넘긴다.
혜영은 9년 전에 저버린 연인을 우연히 만난다. 그러자 옛사랑의 열정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이제 겨우 소설가로서 필명을 갖게 된 남자는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를 택한 혜영을 거부한다. 혜영의 남편은 잘 나가는 광고인이며, 지방대학의 겸임교수다. 아내에게도 성실한, 완벽에 가까운 남편이다. 그는 이유 없이 앓아누워 있는 아내에게서 뭔가 변한 것을 느끼지만 그냥 두고 보기로 한다. 혜영은 가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의 가정을 깰 생각이 없는 것이다. 혜영은 남자의 방에서 살겠다고 하고, 남자는 강제로라도 혜영을 내쫓으려 하고......결국 남자가 방을 나가고 그날 혜영은 홀로 밤을 보낸다. 혜영의 가출을 남편은 정신적인 이상으로 간주한다. 결혼 이후 줄곧 살림만 해온 주부의 우울증으로 여기고 혜영에게 바깥 활동을 권한다. 혜영은 자기에게 `남자'가 있다는 고백을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다짐해 준다.

혜영과 남자는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남자는 그래도 혜영이 자신의 여자일 수 없음을 안다. 이제 둘의 관계는 역전된다. 남자의 사랑은 타오르고 혜영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남편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모범적인 사회인이었던 그가 주먹다짐까지 한다. 혜영은 이제 탈선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안다. 그녀는 남편에게 휴가를 며칠 달라고 한다. 남편은 남자를 만나러 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한다.
마지막으로 남자를 찾아온 혜영. 그러나 남자는 혜영을 돌려 보내지 않는다. 남편과 약속한 날짜에서도 이틀이나 더 지나게 되고 둘은 마치 인질과 인질범 같은 관계가 돼 버린다. 결국 남자가 포기하고 혜영을 돌려 보내게 되지만...... 그 사이 누워 있던 혜영의 시아버지가 세상을 뜬다. 혜영은 임종도 못하고, 장례에도 늦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혜영은 시가에서 버림받게 되지만 남편을 혜영을 감싸 안으려 한다. 혜영은 자신이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것을 말해준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20년이 더 늙어버린 노인이 되는 것이다. 혜영은 미제 물건을 파는 행상이 되어 어느 여인을 방문한다. 혜영에게 내기를 제안했던 그 여인이 이제 젊은 색시가 되어 늙은 혜영을 맞는다.

〈모든 것을 가진 여자〉는 결혼한 여인이 옛 애인과 만나는 멜로드라마이다. 혜영은 결혼 9년 만에 옛 애인을 찾아가고 그와 몇 차례 만나지만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외도가 드러나 가정은 예전과 같지 않다. 그녀는 이제 갑자기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착하고 능력 있는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들 그리고 두 채의 집을 가진 이 중산층의 여인, 이 모든 것을 가진 여인이 지닌 ‘결핍’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박상현의 다른 작품 <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를 연장하고 있다. 결핍되지 않은 것과 결핍이 대립함으로 제시된다. 결핍되지 않은 것은 현실이며,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은 꿈이다. 카피라이터인 남편이 히트시켰던 광고문안 - “내 집, 내 남편, 내 아이들, 그리고 나의 자동차- 어나더. 어나더를 가진 여자는 모든 것을 가진 여자"- 이 현실을 지시한다면, 애인 성우가 쓴 소설 《모든 것을 가진 여자》에서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주인공은 꿈의 공간에만 머문다. 이처럼 분리된 두 대립을 여주인공은 겹쳐보려 한다.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는 남편과 살면서 애인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꿈꾸던 관계가 이루어지면, 그것은 이내 현실이 되고, 이제는 현실로, 가정으로, 아이에게로 되돌아가기를 꿈꾸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현실과 꿈올 계속되는 액자화의 관계로 만들지만, 그 액자화가 심연의 깊이 속으로 의미를 두텁게 하기 보다는 마치 반복 속에서 작아지는 러시아 인형과도 같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결핍을 겪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이 결핍을 채우는 것이 문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인형을 꺼내면 그 안쪽에는 텅 비었다. 텅 빔은 결핍이 아닌 공허이다. 결핍은 욕망과 꿈의 기초이지만, 텅 범은 허무의 공간이다. 결핍 속에서 죽은 405호 아줌마의 대칭형이 후회하며 늙어갈 뿐 죽지도 못하는 ‘모든 것을 가진 여자’이다.
미제 화장품을 파는 여인의 방문은 처음과 끝이 있는 이 이야기의 시간성을 뒤틀어 놓는다. 여인은 혜영의 미래로부터 - 혜영이 극 종반에 남편과 싸워서 멍이 들었던 시점- 아직 시골로 이사 가기 전 서울에 살 즈음, 그러니까 이 극의 진행 시간보다 앞선 과거의 시간으로 찾아온다. 그녀는 혜영에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을 다시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다시 후회를 하는 순간 되돌아간 시간의 두 배만큼을 늙어버린다는 조건의 내기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과 세부의 조건들에 앞서 이 여인의 기능은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의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로, 그리고 미래로 시간을 확장하면서, 혜영과 통일한 삶을 반복한다. 혜영의 경험은 여인에게 굴절되어, 앞선 그리고 뒤이어 올 많은 사람들에게 반복될 경험이 되다. 뒤틀린 시간은 안이 곧 바깥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듯하지만, 실재로는 미로처럼 닫힌 공간을 맴돌 뿐이다 시간은 초월되지 않고, 미로 속에서 먼지처럼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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