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홍의 〈해빙〉은 노인의 성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암시되는 적나라한 성적묘사는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노인의 성은 곧 삶에 대한 알레고리이므로 이것만으로도 작가의 의도는 뚜렷하게 읽힌다. 다시 말해, 이 극의 미덕은 성을 단순히 욕망의 차원에서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관계가 얽혀있는 삶의 문제로 담아내려 한다는 데 있다. 이 극이 진정 힘 있어지는 순간은 보험사기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바로 그 순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귀례의 집에 있는 메마른 샘은 노년의 은유이자 이러한 삶의 문제를 보여주는, 결핍된 생에 대한 명징한 은유로 이해된다. 반편이 용기나 한쪽 다리를 잃은 홍환의 모습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극의 주된 정서는 ‘노인’ 하면 연상되는 허무나 체념과는 거리가 있다. 귀례의 눈치를 보며 파리를 잡는 자실의 모습이나 할아버지들의 뻐꾸기소리, 극 중간 중간에 삽입된 노래 등은 이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들로, 결핍을 여유로 승화시키는 노인들의 삶을 포착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 극은 서로 상처받은 이들이 연대를 모색하여 위무를 나눈다는 점에서 그 흡입력을 발휘한다.

줄거리
백수건달인 아들 홍환과의 위태로운 끈을 쥐고 있는 귀례와 가족도 없이 홀로 살고 있는 자실, 두 할머니의 새로운 관계 맺음에 관한 이야기다. 5년째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자실은 약수터 영감들에게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평생을 시장 통에서 살아온 집주인 귀례는 그런 자실의 행실이 영 못마땅하다. 게다가 자실이 월세마저 제대로 지불하지 않자 귀례는 새로운 사람들을 들이기로 한다. 새로운 세입자로 옥분과 용기가 귀례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옥분이 이사 당일 계약 잔금을 미루게 되면서 자실은 잠시 귀례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는 사이 귀례의 아들 홍환이 집에 들어와 집문서와 돈을 갖고 도망을 친다. 자실에게 내줄 돈마저 잃어버린 귀례는 어쩔 수 없이 자실과의 생활을 받아들인다. 설상가상, 옥분은 홀연히 사라지고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용기만이 집에 남겨지게 된다. 자실이 용기를 빈집에서 꺼내게 되면서 이 세 사람의 동거는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귀례는 자신의 방에서 자실과 할아버지가 정사를 갖은 뒤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에 빠진다. 과거 남편과 그의 여자에 대한 악몽과 자신이 자위를 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한 충격은 귀례를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귀례는 용기와 자실을 더 멀리하게 된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홍환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귀례는 다시 삶의 강한 의욕을 찾지만, 아들의 사고가 보험을 노린 위장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끝까지 쥐고 있던 홍환과의 끈이 끊어짐을 인식하게 된다.
모든 것이 다 새어버리고 온전히 혼자가 되어 버린 귀례는, 자신이 내쳤던 용기와 자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귀례·자실·용기의 위태로운 동거는 새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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