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현근 '양인대화'

clint 2019. 1. 1. 10:28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양인대화>영어듣기평가의 한 문항을 두고 해설하는 강사와 수강생을 등장시켜 언어 소통의 부조리성과 불가해성을 폭로한다. 문제 속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이 눈앞에 등장해 반복적인 대화를 들려주고 이를 통해 출제자의 의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난국에 부딪친다. 결국 출제자가 소환되는데 언어가 일으키는 즉물적 소동을 겪으면서 관객은 예술가와 수용자, 피조물과 창조주 간의 형이상학적인 투쟁까지도 목도하게 된다.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수시로 차원 이동하는 형식 유희가 유쾌하고 참신하다. 이 가운데 의미없는 세계에 수다함으로 대응하는 인간 조건에 의문을 품게 되고, 위계와 권력관계를 이용해 의미를 선점하거나 이를 강요하는 현실 세계의 부조리함까지 마주하게 된다. 출제자는 의미 선점의 권력을 휘두르지만 곧 불안과 초조 속에서 흔들리고, 정답을 강요하는 쪽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의 대변자인 강사는 화려한 수사로 위기를 모면하려 들지만 공허해질 뿐이다. 별다른 세트나 오브제 없이 진행되는 이 연극은 뒷편의 연단 하나와 의자 두 개만을 두고 쏟아놓는 언어의 양과 밀도로 객석을 휘몰아친다. 비유에 대한 회의, 기표와 기의 간의 미끄러짐 등을 잘 계산된 현학취로 유쾌하게 풀어간다.

 

 

 

심사평

문제작이 많았다. 소재도 다양했고 나름의 완성도에 신선한 형식미까지 갖춘 작품이 여러 편이라 어떤 작품을 올려야 할지 오랫동안 원고들을 뒤적였다.

수상작 '양인대화'는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의 영어 듣기평가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큰 사건이나 갈등도 없고 그저 테니스공을 치고받듯 말들이 오고 가는 작품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말들이 어찌나 능청맞고 화사하고 요사스러운지 읽는 내내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말의 감각에 도취되지 않았다. 말들의 향연 속에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지 물어보기도 하고, 부조리의 유희인가 싶으면 문제의 부정확성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새 누군가를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국적 근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What a lovely day to be outside!'라는 평범한 영어 문장을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목도하면, 같은 문장이 전혀 다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능청맞고 야심만만한 작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한다.

예년 같으면 최종 심의에 오른 한두 편을 덧붙여 더 언급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아까운 작품들의 제목을 가능한 한 많이 거론하기로 하자. '분필싸움' '살인모의' '안과 박' '우리는 개처럼 엎드려 사랑을 짖었다' '컬럼비아대학 기숙사 베란다에서' '착한 아이' '하와이에서 생긴 일'. 새로운 작가들이 대거 나타나려는 조짐이 보인다. 그들 모두 구태의연한 과거의 세상을 훌쩍 넘어서시길 바란다. (이병훈, 김명화)

 

 

 

당선소감

저는 2년 전쯤에 희곡과 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생성해내는 에너지가 저를 매료했습니다. 제가 희곡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인물의 살아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독백이든, 두 사람 간의 대화든,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쏘아붙이는 난장판이든, 살아 있는 목소리들이 무대 위에서 메아리치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실제로 목격하면 마음이 설렜습니다. '양인대화'는 그런 느낌에서 쓰기 시작한 작품이었고, 그런 느낌을 전달하고자 부단히 노력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쓰려고 하니 세상만사 모든 게 대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극작 자체도 어떻게 보면 작품과 작가 간의 치열한 대화였습니다. 이건 아니야, 저건 아니야,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떨까, 난 이게 좋은데. 나 자신도 모르는 에너지가 작품과 나 사이에 생겼습니다. 저는 이 에너지를 이용해서 읽는 이, 보는 이에게 위안과 재미를 주는 작품을 쓰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이 제게 위안과 재미를 준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열매를 맺어 기분 좋을 따름입니다.

감사할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내 주위를 열정으로 채워주는 친구들과 동료들. 작품 보는 눈을 한층 더 깊게 만들어주신 선생님들. 그리고 위대한 작품들. 위대한 극작가들. 힘듦과 지루함을 달래주었던 모든 연극 공연과 연극계에 종사하는 연극인들까지. 시간을 들여 작품을 심사해주신 심사 위원분들과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신 조선일보사에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방상미, 이름 석 자 불러줄게. 엄마 고맙고 사랑해요!

 

 

오현근 : 1994년 대전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동 대학원 영문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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