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주 공사장, 고된 인부들의 거친 욕설과 끈적한 농담이 오가는 허름한 함바집.
17년 전, 농아 동생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고 과거를 숨기기 위해 함바집으로 숨어 들어온 유현숙. 그러나 살해에 가담했던 옛 애인 구광모가 찾아오면서 그녀의 삶은 폭력과 육욕으로 짓밟히기 시작하고, 구광모의 폭력은 나날이 악랄해 지기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두 자매에게 성희롱을 일삼던 일용직 노동자 정갑수가 참혹히 살해당한 채 발견되면서 묘한 기류가 흐르는 함바집…. 서서히 밝혀지는 미스터리 한 사건의 진실과 잔혹한 복수의 반전.

작품의 밀도가 굉장히 높고, 극적 완성도가 훌륭하다. 이 시대, 소외된 인간들의 남루한 삶을 통해 우리 사회를 재조명하는 고재귀 작가의 신작으로 인간에게 깃든 폭력성과 그 폭력의 순환을 다루고 있다. 공사장 인부들의 거친 욕설과 끈적끈적한 농담이 오가는 함바집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 사건으로 팽팽한 긴장감과 숨 막히는 반전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연극적 재미가 높은 작품이다.

사건을 통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연속성을 그리며 오늘날 폭력이 난무하는 야만의 시대에 대한 경종이다. 폭력은 양철지붕을 요란히 두드리는 빗방울처럼 서늘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서슬 퍼런 폭력은 서서히 고삐를 조이며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냈다. 보이지 않는 피가 무대 곳곳에 얼룩지고 흩뿌려졌다. 마주하기엔 불편한, 날것의 폭력이다. 폭력을 다뤄내기 보단 폭력을 있는 그대로 노출해낸다는 점에서 참상은 생생하게 목도된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거슬림’이다. 양철지붕이 씌워진 무대 위 함바집은 일용직 인부들이 때마다 끼니를 떼우는 일상적 공간에서 본능으로 점철된 욕망을 게걸스레 해치우는 폭력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빵을 씹고 감자를 삼키고 국수를 말아 넣는 왕성한 식욕은 개고기에 이르러 역겨우리만치 잔혹한 욕망의 폭력성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쉬이 숨이 끊어지지 않는 개의 멱을 따서 기어이 음식으로 만들어먹는 인부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은 개고기를 씹고 삼키는 소리로 더욱 극대화된다. 무대를 등 진 채 정신없이 개고기를 입에 쳐 넣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스럽다. 폭력의 시작을 암시하듯 개고기 그릇이 늘어선 식탁 뒤로 모습을 드러낸 구광모는 묵은 폭력의 역사를 밑바닥부터 끄집어낸다. 폭력이란 관계도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이들은 희생자이자 가해자로 폭력의 역사적 순환을 또다시 자행한다. 의붓아버지에 이은 구광모의 폭력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름통을 손에 쥔 유현숙, 그녀의 목을 향해 겨눈 박기태의 식칼과 폭력에 몸서리치며 날카로운 포크를 뽑아들었던 유지숙, 그리고 그녀에게 성희롱을 일삼던 정갑수의 변사체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폭력은 이윽고 예상치 않은 새로운 폭력의 등장으로 휴지기를 갖는다. 하지만 이내 폭력은 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스멀스멀 머리를 쳐든다. 폭력의 고리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자매의 모습은 또 다른 누군가의 손길로부터 자행되기 시작한 익숙한 폭력의 기운을 감지해낸다. 지숙이 살뜰히 보살폈던 화분은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핏빛 노을에 물들어간다. 극은 서로를 암묵적인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만들어놓은 채 간과할 수 없는 ‘거슬림’으로 마지막까지 똬리를 틀었다.

예상대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귀결이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에서 남겨진 ‘거슬림’의 잔영이 고스란히 ‘양철지붕’으로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늑대로 변해버린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그로 말미암은 날 것의 야만성을 그대로 무대로 옮겨오는 것. 그것이 고재귀 작가의 농축된 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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