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 한현주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항상 사건은 순식간에 벌어지고, 우리가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시간은 길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건 자체뿐만이 아니라 전과 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 발생 직후에는 그것 자체를 물리적으로 묘사하려 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게 남는 것은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다. 나는 후자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진 이후를 극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또, 사건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닌 다양한 목격자들이 극을 끌어가게 하고 싶었다. 사건의 극적인 진행이 아닌, 목격에 관한 진술 말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상황의 목격자였다. 이 극에 나오는 어떤 인물처럼 상황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고, 때로는 호기심의 차원에서 즐기거나 쾌감을 느끼고는 불편해하기도 했다. 하나같이 찜찜한 감정이다.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지만 쉽지도 않다. 그래서 도리어 당사자들을 탓하기도 하고 애먼 사람에게 신경질 내기도 한다. 어찌할 바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끊임없이 딴 데 정신을 팔아보지만 자꾸만 그 상황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래서 말이라도 하게 된다. 이야기를. 이 극의 인물들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한다.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그 순간의 자기감정에 관해 서술하기도 하는 것이다. 배우의 연기를 가정했을 때 쉽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직 말하기를 통해 관객을 그 순간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연극 자체가 가지는 매력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실제의 이미지가 아닌 오직 배우에 의해서 그려지는 이미지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 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같은 말하기 방식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일상에서 누구에게도 쉽게 터놓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때 무대는 다양한 고백의 장이 된다. 자기 합리화와 수치심, 거짓과 진실을 동반하면서 반드시 해소와 해결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나’,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한번 들여다보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한번 들여다보는 것이다.
초연 연출노트 : 박해성
이 연극은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 진행된다. 등장인물 중엔 청소년도 있고 성인도 있다. 각자 자신의 시각으로 삶과 사건을 바라본다. 그런데 청소년의 시각과 성인의 시각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 연극은 그렇게 ‘청소년’과 ‘성인’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저 각각의 ‘인물’일 뿐인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청소년은 미숙한 성인이 아닌, 스스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 주인공 중 하나다. 물론 세상은 두렵고 혼란스럽다. 마찬가지로 성인도 성숙한 청소년이 아니기에 허세와 비겁함 사이를 오가며 혼란스러워한다. 청소년은 성인의 과거가 아니며, 성인은 청소년의 미래가 아니다. 성인과 청소년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각각의 존재일 뿐이다.
이 연극은 교실이 아닌 피시방을 배경으로 한다. 교실은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청소년이 주인공인 것처럼 돌아가지만, 모든 청소년이 학생인 것도 아니고, 청소년만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도 아니다. 이 연극의 배경은 모두가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단역일 뿐인 ‘세상’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책상에서 각각의 모니터만을 외롭게 응시하며 살아간다.
한 시간 남짓 펼쳐지는 이 극은 이미 지나간 어느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한 사람의 상처와 고통만으로 끝나고 잊힐 수도 있는 그 3분짜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여러 사람의 삶이 변했다. 그 사건이 한 사람의 피해로 끝나고 묻혀야 했을까? 그 3분이 여러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킨 걸까? 이야기는 이 같은 질문을 따라 이어지다가 그 3분 뒤에 숨겨진 47초와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다. 그렇다. 이 연극은 사실 그 47초에 관한 얘기이다. 우리가 모르던 혹은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고 전하던 누군가의 3분 혹은 나의 3분 뒤에 숨겨진 47초.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 47초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못 본 척하고 싶은, 혹은 정말로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 47초. 그 47초로 인해 그 고통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되었고, 나는 그렇게 고통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 고통은 어느 한 사람의 몫이 되고, 고통 받은 사람은 다른 이에게 그 고통을 떠넘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고통의 고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을 것이고, 우리는 곳곳에서 들리는 고통의 아우성 한가운데에 혹은 그 고리에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계속 그 고통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일 뿐이라고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47초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묻어두어야 할까, 아니면 품속에서 끄집어내어 내 고통으로 받아들여야할까.
우린 답을 모른다. 단지 혼란스러워할 뿐이다. 안타깝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고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지할 때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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