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가 어두워지면 어둠속에서 드러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승용차의 질주음. 차내 라디오를 통해 숨가쁘게 흘러 나오는 지금, 여기, 우리의 삶, 현실, 역사를 떠올리는 방송멘트. 그리고 타이어 펑크. 급정거하는 기분나쁜 마찰음. 한동안 정적 ―. 무대가 밝아지면 고속도로 변의 한 사무실. 고장난 차를 신고하기 위해 전화를 빌리러 들어오는 여자. 여기서 벌어지는 '산者를 위한 한 판 씻김劇' 여인과 소녀들이 이끌어가는 제의는 섬뜩한 공포와 함께 잊고 살아가는 우리의 전통적 민족정서로서의 아름다운 충격을 불러 일으킨다.
무질서와 모호함만이 존재하는 실존적 세계에서 단절되고 소외되는 인간의 내면을 섬뜩한 형상으로 그리고 있는 이현화가 `81년에 발표한<산씻김>은 우리의 전통 무속을 통해 현대인의 억압된 본성을 드러낸 작품이다.
<산씻김>이란 제목은 전라도지역에서 행해지는 死靈굿의 일종인 씻김굿에서 차용된 것이다. 씻김굿은 죽은이의 원한을 깨끗이 씻어주어 극락천도하게 하고 이로 인해 살아있는 자들의 삶을 죽은자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무속의 일종이다. 즉 삶과 죽음을 확실하게 구분지어 죽은자는 죽음의 세계로 보내고 산 사람은 더욱 충실하게 생을 영위하도록 발복을 기원하는 굿이다. 그런데 씻김이 아니라 산씻김이라고 명명을 한 것은 씻김굿의 형식은 빌려오되 해원의 대상을 죽은자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으로 설정한 작자의 의도를 확실히 한 것이다.
자동차사고로 추측되는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속도로변의 어느 사무실을 찾은 '여자'는 그곳에 갇히게 되고 이어 등장한 '여인'의 이상한 행동들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씻김굿을 주재하는 당골로 설정된 여인은 침묵으로 여자의 두려움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청진기.쇠망치.쇠고리.수술용 메쓰 등 폭력적 이미지를 가진 무구(巫具)들을 젯상 위에 정돈하며 굿의 채비를 갖춘다. 역시 당골의 역할을 맡은 소녀들의 도움으로 여인은 안당굿(굿하는 장소와 시간을 고하고 굿의 목적을 밝히는 의식) 을 시작으로 무가를 읊으며 씻김굿을 진행한다. 이들의 祭儀가 계속되자 여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에 분노하며 '법'의 무서움을 강변한다. 그러나 폭력의 세계에서 법의 존재는 무력할 뿐, 여자는 여인과 소녀들에 의해 젯상 위에 묶이고 씻김굿의 대상인물이 된다.
여자의 옷은 여인에 의해 오려내어져 계단 층층이 놓이는데 이는 질닦음(죽은자가 갈 저승길을 닦는 의식)의 과정이며, 여자가 링겔병의 물방울을 이마에 맞고, 물그릇에 담갔던 빗자루로 몸을 쓰는 행위들은 씻김의 의식이다. 이어 신칼로 여자의 몸에 매어진 밧줄을 끊는 고풀이(죽은자가 이승의 원한에서 풀려 자유로워지는 의식)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씻김의 제식에 따라 여자는 이성으로 억압해왔던 무의식세계의 해방을 경험한다. 씻김굿이 끝나는 4경 끝부분에 이르러 극적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폭력의 희생제물이던 여자가 씻김굿을 통해 가해자였던 여인을 잔혹하게 폭행하는 폭력의 행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님'(폭력성)의 강력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씻김굿의 의례를 빌려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이를 거부하려던 여자가 극한적인 폭력의 공포를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을 해방시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 굿거리가 열두 거리라는 것은 일반적 관념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혹은 무속 절차에 따라 열두 거리는 일고여덟 거리도 되고, 때로는 늘어나 스물네 거리 이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굿거리의 ‘거리’는 굿을 주도하는 무당에 따라 줄거나 늘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굿거리의 이름도 지방에 따라 다르고 무당의 학습에 따라 명칭이 달라질 수 있다. ‘씻김굿’이라는 것도 굿거리의 한 절차일 수 있는데 이름도 ‘천도굿’으로 불려질 수도 있고, 그냥 굿으로 일컬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호남지방에서는 ‘씻김굿’이 죽은 망자에 대한 의식 전반을 가리킨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묻혀 놓은 온갖 죄스러운 더러움에 짓눌려 극락으로 가지 못하므로 때를 씻겨서 말갛게 만들어 정한 저승으로 보내야 한다는 관념, 그것은 한국인의 심성이 지닌 종교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씻김굿’에는 죽은 사람을 위한 씻김도 있고, 여유 있는 노부인네를 생전에 미리 씻겨 사후를 기약하는 씻김굿도 있다. 후자를 ‘산씻김’ 혹은 ‘맑은 씻김’이라고 하는 대신 전자를 ‘궂은 씻김’이라고 한다. 씻김굿에 맑은 것과 궂은 것이 있다는 것은 죽음을 궂은 것, 삶을 맑은 것으로 생각한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사(死)=음(陰), 생(生)= 양(陽)으로 간주했다는 의식행위를 반영한다. 씻김굿은 곧 의식이고,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심성의 제의이다. 그것이 ‘산씻김’이 되어 동랑레퍼터리에서 상연되었을 때 우리는 그런 연극을 ‘제의연극’이라고 부른다.
제의연극은 70년대의 의식을 대변하는 인기 레퍼토리들이었다. 더 올라가 20년대, 50년대만이 아니라 근년에 들어 그로토우스키, 장 주네에 앞서서, 어쩌면 프랑스의 아르토 이전의 모든 광대들은 바로 제의에서 파생된 연극을 놀았다는 뜻에서 제의연극의 원조쯤 될지 모른다. 제의연극은 일찍이 굿이 생활의 일부였을 때는 아무런 연극적 의의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그것을 재현한다면 충격이 될 수 있다. 비일상의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상에 찌든 마음과 눈으로 하여금 놀라움을 안겨 주는 충격의 연극은 의식의 연극일 수도 있다. 그 의식은 문화 혹은 근원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리거나 잊고 있던 ‘그 무엇’을 성찰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동랑의<산씻김>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심신에 깃든 더러움을 몰아내어 그로 하여금 맑은 경지로 인도하는 굿의 연극이고, 연극을 통해 오늘날 제의가 다하지 못하는 믿음을 연극적으로 풀어 먹이려고 한다. 그런 뜻으로 보면<산씻김>은 도입부에서 있어서 한 여인(윤소정)이 갑작스럽게 어떤 상황에 내던져진다는 설정은 다분히 카프카적인 설정이거나 굳이 말한다면 이현화다운 비의(秘儀)의 현대적 제시인데, 제의극에 굳이 사건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으므로 오히려 그러한 한 여인의 ‘사건 속으로의 몰입’은 너무 드라마를 의식한 것으로 판단된다. 살아 있는 사람을 망자로 취급해서 씻김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상태에서 씻겨내는 이 의식은 분명히 카톨릭적인 의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점에 있어서 유덕형 연출이 한국 전통의식에 카톨릭적인 의식을 접합 시키려고 한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고대심성이 비록 고대의 의식을 차렸거나 현대적인 의식으로 정립되었거나 거기에 인류의 보편적인 공동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품 정도의 작품에서 그렇게 극적인 도입을 챙겨야 했겠는가, 혹은 굿적인 흐름에 기성종교의 의식을 일부라도 혼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말하자면 한국 전래의 ‘씻김굿’의 일부만이 무대에 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아닌 한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 자체도 충격일 수 있다. 그러므로 차라리 순수한 ‘씻김’의 과정이 면밀히 계산된 상태에서 무대에 재현되고 재연되었더라도 이미 우리는 산 망자로서 그 씻김의 정화작용에 말려들 수가 있었을 것이다. 굿에 말려든 한 여인의 ‘보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함께 굿을 노는 귀중한 체험을 연극을 통해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국 제의의 기능성을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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